화천은 푸르다. 푸르다 못해 시리다.
황량하다 싶을 정도로 굽이굽이 펼쳐진 한낮의 강이 그렇고,
수많은 눈물들이 고여 이루어진 웅덩이같은 호수가 그러하며,
그 위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말없는 상처를 감싸 안은 산들이 그렇다.
하물며 하늘 위로 흘러가는 한 점 구름마저 푸른색이 감도니,
이곳은 노란 봄이 찾아와도 언제까지나 파아란 색을 간직하고 있는
시리고 시린 북단의 등허리다.
파로호의 아침공기는 풋사과처럼 새콤했다.
달력 상으로는 완전히 봄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었지만,
이곳은 그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곳인 양
시간을 살짝 비켜 있었다.
강원도 간동면 구만리.
파로호는 1944년에 북한강 협곡을 막아 축조한 화천댐으로 생긴 인공호수다.
이곳에는 화천수력발전소가 있는데, 6·25전쟁 때
이 발전소를 손에 넣기 위해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결국 북한군과 중공군 수만 명을 수장시키며 승리한 곳이라,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파로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파로호(破虜湖)는 오랑캐를 물리친 호수라는 뜻이다.
올해(2010년) 4월부터 화천군은 파로호에 유람선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물빛누리'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배는,
파로호 선착장인 구만리 배터를 출발해 평화의댐까지 24km를 약 80분간 운항한다.
현재는 주말과 휴일에 하루 1회 운항중인데,
정원 70명이 다 차는 일이 빈번해서 곧 2회 운항 할 예정이라 한다.
자동차도 실을 수 있으니, 드라이브 중에도 한 번 탑승해 볼 만 하다.
배를 타면 어쩐지 당연히 후미쪽으로 갈매기들이 따라붙어야 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여기는 호수라서 갈매기는 따라붙지 않는다.
유람선의 또다른 재미인 갈매기에게 새우깡 주기 놀이를 못 해서 아쉽다.
이런 배를 띄울 만큼 큰 호수라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배로 또 한참을 달린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처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 다소 밋밋한 경치에 지루할 수도 있다.
그 때 즘이면 화천발전소가 보이고, 평화의댐이 보이니 한 번 즘 타 볼 만 하다.
예전에는 이 아래가 모두 굽이굽이 산골짝이었을테고,
또 이 영역을 차지하기위해 적과 아군을 합쳐 수만의 목숨이 희생되었으니,
그런 사실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좋을테다.
시린 강바람이 풀가동하는 머리를 한없이 차갑게 식혀줄테니까.
이윽고 배가 멈추면 바로 '세계 평화의 종 공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 공원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보내온 귀한 종들을 전시해 놓은,
평화의댐 바로 옆에 세계평화의 염원을 담아 조성된 공원이다.
여러가지 종 뿐만 아니라, 지난 전쟁과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을
일깨워주는 소품들도 전시해 놓았다.
그 중 총알자국이 나 있는 은 실제 벽을 옮겨놓은 것이라 한다.
공원 윗쪽에는 '염원의 종'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 있다.
이 종은 아무리 때려도, 바람이 불어도 울리지 않는 종이다.
남북의 분단현실을 표현한 침묵의 종이라 그렇다.
아마 통일이 될 징후가 보이면 이 종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질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평화의 댐.
북한이 금강산 댐으로 수공을 펼치면 서울 63빌딩의 반이 물에 잠긴다며
어린애들 코 묻은 돈까지 강탈하며 만들었던 그 웃지 못할 코메디의 증거물.
이 댐은 1987년 착공하여 1989년 1차 완공을 했다.
총 공사비 1700억 원이 들었고, 그 중 639억 원은 국민 성금이었다.
그 후 1993년 감사를 받으면서, 금강산 댐의 저수량과
평화의 댐의 필요성이 많이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2002년, 굳이 수공이 아니더라도 금강산 댐에 안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징후가 발견되어 2단계 증축공사.
결국 2005년에 완공하여 총 공사비는 모두 약 4천억 원이 들어갔다.
이윽고 평화의댐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동하면, 여기도 종이 하나 보인다.
'세계평화의 종'이라 이름붙은 이 종은, 세계 각국에서 수집된 탄피들을 모아 만든 종이다.
1만 관(37.5톤)의 무게로 주조된 이 종은, 청동으로 된 종 중에는 세계최고라 한다.
그런데 이 종은 1만 관에서 1관이 모자라는데,
이것은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딱 1관이 모자라게 일부러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 윗부분에 있는 비둘기들 중 한 마리의 한 쪽 날개가 잘려져 있는데,
이 부분이 그 모자라는 1관이라 한다.
남북통일이 되는 날 이 비둘기의 날개를 붙일 거라고.
세계평화의 종은 관람객들이 직접 타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세 번 타종을 했다.
종 옆쪽에는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악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각 수상자들에게 부탁해서 실제 손의 본을 떠서 만든 것이라 한다.
내려오는 길에 무심히 서 있는 비목 하나.
1960년대에 이 곳에서 10km 즘 떨어진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던 한 청년장교가,
6.25 전쟁 때 전사한 한 무명용사의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하고 시를 지었단다.
그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가곡이 바로 '비목'.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기위해 만든 공원이 이 '비목공원'.
이 모두를 뒤로하고 다시 떠나는 길에 가슴이 시렸다.
이 모든 것이 남북분단 때문.
그 모든 것이 남북분단 때문.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이 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외부의 적과는 대치하고 또 내부에 적을 만들어 싸우려는 상황을,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 하는 자들의 만행을,
몰아붙여서 해결되는 그 비이성들을,
세월이 지나도 먹히는 그것을,
정말 어쩔 수 없단 말인가.
갑갑하고 또 갑갑하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를 비난한 적은 있으나,
아직 단 한 번도 내 조국을 미워한 적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