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상처를 가지고 프리터로 혼자 사는 남자, 하루종일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히키코모리, 젊은 사원의 등장으로 스스로 위축된 직장인 노처녀, 혼자 사는 비디오 가게 주인, 엄마 없는 부녀, 하루종일 공원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세상 모든 일을 자신과 연관지으려는 할머니 등.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부족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마음(고코로)을 가져버린 공기인형 '노조미'. 어느 햇살 맑은 날 동화같이 피어나 활기차게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스치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마주치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조미.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자신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대용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수시로 깨닫는다.
'그들'의 삶은 노조미의 주인이었던 프리터 남자를 통해 한 마디로 표현된다. 어느날 남자가 일하는 가게에서, 일하다가 저지른 실수 그의 상사에게서 듣는 말. "너 따위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리고 그 남자 역시 사라져버린 공기인형 '노조미'를 대신할 또 다른 공기인형을 집에 들여놓는다. 인형이건 사람이건,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잃어버리고, 존재감을 상실하고, 대용품으로 전락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텅 빈 사람들' 속에서 노조미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녀가 그 많고 많은 가게들 중에 하필이면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테다.
사람들은 현실의 대용품으로 영화를 본다. 화끈한 액션을 보기 위해 뭔가 없나 찾으면, 가게 주인은 이러이러한 게 있다고 알려준다. 누구누구가 나온 영화 중에 재미있는 것 없나 찾으면 직원이 이러이러한 영화들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런데 '노조미'라는 영화는 그저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한' 존재일 뿐이다. 가게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인 존재.
'노조미'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어 만들어진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조미'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마음'을 불어넣어 주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녀는 대용품이고, 대용품이 사람들에게 진짜로 현실적인 '어떤 것'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히, 은은하게, 보일듯 말 듯, 들릴듯 말 듯 한 작은 바람으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디선가 불어온 작은 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린 히끼꼬모리 여자. 오랜만에 몸을 일으켜 내다본 창 밖에는, 눈부신 햇살 아래 '공기인형'이 누워 있다. 여자는 '아름답다'며 감탄한다. '대용품', 혹은 영화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그 후에 히끼꼬모리가 집 밖으로 나오는 문제는, 현실 속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약간 희망적일 수도 있다. 별로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한' 작품이라도, 이 세상 그 누군가에게 어떤 조그만 의미라도 부여해 줄 수 있다면 헛되이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의미도 되니까. 그것이 비록 제작자가 처음에 의도했던 목적도 아니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의미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손을 떠난 작품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작은 바람이라도 일으켜 줬다면 그것만으로 된 것 아닐까라는 시각.
어쨌든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조미는 사람들간의 소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고, 텅 빈 존재를 채워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욕구충족 용도 만으로,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는 인형이 다시 될 수도 없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고개를 잠시 돌릴 수 있을 만 한 작은 숨결. 그 작은 숨결을 바람에 실어 날리는 것이 바로 '노조미'가, 영화가 그리고 예술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숨결은 제작자가 의도하지 못했던 의외의 것일 수도 있으니, 그 의미는 제각기 알아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