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도 많고 출구도 많다. 속은 더 깊어 마치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길들이 낯선 행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어디로 들어가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한때는 광주에서 손 꼽히는 큰 시장이었으나, 지금은 인기없는 재래시장이라는 인식으로 통하는 그곳. 바로 광주 대인시장이다.
광주 대인시장은 6.25전쟁 후 광주역 인근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생긴 장터다. 그 때 당시 이 시장 근처에는 광주역과 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있어서, 이곳은 그야말로 인파로 항상 북적이는 목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한 때는 광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런 시장은 이후 역과 터미널 등이 이전하고, 백화점, 대형할인마트 등이 인근에 들어서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평일이든 주말이든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래시장'의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저 오래된 재래시장이라는 생각만으로 대인시장을 들어서면 곧 당황하게 된다. 여느 재래시장에는 없는 모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그려진 벽화가 우선 눈에 띄고, 곧 장미란 선수가 셔터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벽화 뿐만이 아니라 각종 설치물, 포스터, 현수막 등이 여기가 결코 평범한 재래시장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그걸 증명이나 하듯 곳곳에 예술가들의 작업장들이 눈에 띈다. 재래시장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라니. 언뜻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듯 한 조합이 펼쳐졌다.
대인시장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건 아니다. 이곳에 예술인들이 들어온 것은 2008년 11월 이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는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시장 내에 빈 가게들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복덕방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결과 재래시장 안에 예술품 전시공간이 마련되는 특이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일부 작가들이 비엔날레가 끝난 뒤에도 점포를 임대해 작품활동을 계속 했다. 그렇게 우연히,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대인예술시장'이다.
예술인들은 단순히 재래시장 한 켠에 싼 점포를 작업실로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상인들과 함께 대인시장을 예술시장으로 꾸미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2009년에는 상당히 많은 행사들이 시장 안에서 열렸다.
그리고 시장 안쪽에 상인들과 작가, 관람객들의 어울림 터인 '미나리(里)상회'라는 공간도 마련됐다. 원래 쌀가게였던 곳을 개조한 '미나리상회'. 상회라는 이름이 어색하다면 '센터'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 하다.
이곳은 시장상인과 예술인들의 만남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면서, 지역 예술인들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사무실이기도 하다. 대인예술시작 프로젝트를 위한 각종 워크샾이나 투어 등의 사업들을 담당하기도 하고, 소식지를 발행하기도 하며, 대인시장의 역사와 현재모습 등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를 수집하는 역할도 도맡고 있다.
외지에서 온 방문자에게도 이 미나리 상회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곳에서 대인시장 지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지도에는 각종 예술품의 위치와, 작업실 위치 등이 나와있다. 그래서 단순 방문객이라도 대인시장을 갔다면 꼭 한 번 들러봐야 할 곳이 바로 이 '미나리상회'다.
사실 대인예술시장 조성 프로젝트는 2009년에 일단락되었다. 시장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홍보물도 해 지난 2009년도 행사들이다. 작년에는 꽤 큰 규모로 이런저런 행사들이 열려서, 오랜만에 시장에 활기가 돌았다고 한다.
올해도 또 그만큼 큰 규모로 열릴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래도 시장 곳곳에 작은 규모로 전시회와 각종 이벤트들이 열리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술시장 프로젝트는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대인시장 사람들은 또 한바탕 하기 위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시장에서 무슨 예술이냐며 시큰둥했던 시장 사람들. 하지만 곧 예술품을 구경 온 사람들이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술이 별 거 있냐며 그림을 직접 그리기 시작한 상인들도 생겼고, 가게 앞 공방에 갖다 준다며 남는 재료들을 차곡차곡 챙겨놓는 상인들도 생겼다 한다.
그런 사실들을 놓고 보면 일단 굴러 들어온 돌인 예술인들이, 지역 주민들의 공감과 화합을 이끌어 내는 데는 성공한 듯 하다. 게다가 예술인이라고 이슬만 먹고 살지는 않는다. 예술인이든 시장 상인이든 '먹고 사는 문제'는 공통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서로 공통의 관심사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꾸준히,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 기반을 확실히 다져 나가는 것이 아닐까.
시장 한 켠에는, 아직 미완성인 시장 안내도가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일부러 그랬는지, 잊어 버렸는지 시장 한 귀퉁이 그늘막에 자리잡고 있다가, 시장을 벗어나려 할 때 그제서야 내 눈길을 끌었던 입체지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게 하나하나마다 애정을 가지고 공을 들여 작업했음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썰렁한 시장 분위기가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고, 불 꺼진 예술인들의 가게들이 많아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대인시장은 이 입체지도처럼, 한땀한땀 애정이 깃든 공을 쏟아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면 조금 늦으면 어떠랴. 아니, 이런 일에 빠르고 느림이 어디 있으랴.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처럼, 대인시장도 그렇게 끝없이 흐르면 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 다시 찾을 때는 예전과는 다른,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천천히 아름답게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지켜볼 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