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알고 있듯,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그래서 당연히 화산 분화구도 많이 남아있다. 제주도 말로
오름은 산이나 산등성이를 뜻하는데, 대부분의 제주도 오름에는 분화구가 있다. 그정도로 수많은 분화구들을 제주도에서는 볼 수 있다.
그 중 한
분화구인
산굼부리를 찾아갔다. 사실은 여태까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곳이었고, 일행 중 제주도 토박이가 없었다면 아직도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곳이었다.
처음에는 한라산 백록담처럼 그런 식으로 되어 있겠거니 하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저 해질녘이 되었으니 가까운 오름에 올라 석양이나 찍어보자는 단순한 의도였다. 그런데 이 산굼부리는 제주도의 그 많은 분화구들과는 다른 독특한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 하나뿐인,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분화구 형태라는 것이다.
일단 산굼부리의 갈대밭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언덕을 따라 쭉 늘어선 갈대들 너머로 뾰족한 나무가 보였고, 푸른 들판이 보였고, 또 갈대가 보였고 산이 보였다. 겹겹이 펼쳐지는 초목과 들판들 때문에, 여기가 제주도인지, 섬이 맞긴 맞는지 의아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둠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리는 태양은 붉은빛을 더해, 세상에 붉은 커튼을 드리운 듯, 불의 마법을 건 듯, 붉으스름한 석양의 그림자를 한껏 늘이고 있었다. 게다가 안개. 언덕 주변을 온통 우윳빛으로 감싼 반투명으로 빛나는 하얀 베일같은 안개 덕분에, 산굼부리 일대는 전체가 판타지에서나 나올듯 한 노을의 나라였다.
제주도 말로 화산체의 분화구를 '
굼부리'라 한다. 굼부리는 산 위나 중턱에 둥그렇게 움푹 팬 모양도 있고, 산체의 한쪽 사면이 도려내진 듯 말굽형으로 벌어진 모양도 있다. 그런 모양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그런 분화구를 모두 굼부리라 부르고, 지역에 따라서는 움부리라고도 한다.
그런 굼부리 중에서도 단연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
산굼부리'이다. 산굼부리는 산체에 비해서 아주 큰 화구를 가지고 있다. 산이 어느정도 펼쳐져 있고 그 정상에 분화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지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서 주위에 약간의 둔턱이 쌓인 형태이다. 그래서 산굼부리 내부의 분화구 바닥은, 주변의 평지보다 100미터 정도 낮게 내려앉아 있다 한다.
산굼부리는 이렇게 화구 둘레가 반지 모양으로 둥그렇게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폭렬화구이다. 화산활동 초기에 단시간에 비교적 약한 폭발만 일어나고 활동이 중지되어 형성되는 이런 형지를,
마르(maar)라고 한다.
이런
마르형 화구는 산굼부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곳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독일, 일본 등에 몇 개가 알려졌을 뿐일 정도로 희귀한 것이다. 산굼부리는 그 자체 만으로도 희귀한 지형이지만, 그 주변과 분화구 내부의 식생 또한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분화구 주변에 펜스도 둘러져 있고, 조망대라고 세워놓은 것도 그리 높지 않아서, 분화구 바닥까지 내려다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런때 키라도 좀 크다면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옆에 있던 키 큰 일행도 바닥이 안 보인다고 위로를 건내 주었다.
산굼부리를 소개한 제주도 토박이 블로거 '
키다리아저씨' 말에 따르면, 어릴 때는 이곳이 특별히 관리가 되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입장료를 낼 필요도 없었고, 아무데나 막 들어가볼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놔 둔다면 사람들 손길로 금방 자연이 훼손되고 말테니까.
분화구 바닥을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 하지만 분화구 내부를 좀 더 깊고 넓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전망대가 좀 만들어졌으면 싶기는 했다. 은근히 유명한 곳인지, 외국인들도 꽤 많이 보이던데, 위태위태한 좁은 계단 몇 발짝 올라가게 만들어 놓은 전망대는 참 어설펐기 때문이다.
어쨌든 산굼부리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별로 필요 없는 곳이다. 분화구 주위나, 분화구 내부 뿐만 아니라, 오름 둘레로 나 있는 길들을 따라서 한적하게 산책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니까.
여름에 찾아가도 해가 지면 다소 쌀쌀할 수도 있겠지만, 산굼부리에서는 산책을 즐기는 동시에 석양을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바람에 갈대에 붉은 비단이 쓸려나가듯, 산굼부리의 어둠은 곱게곱게 조금씩 스며든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하루를 마감하고 아무 걱정없이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