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를 기다렸다. 강화8경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고려산의 낙조는 고려산 서쪽에 있는 낙조봉에서 보는 것이 좋다 했다. 고려산에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낮은 언덕 몇 개를 넘다가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언덕을 올랐더니 낙조봉이었다. 억새 밭 펼쳐진 산등성이 너머로 내가저수지(고려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조그만 마을이 보였다. 그 너머로 외포리 앞바다와 멀리 석모도까지 거뭇하게 보여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전망대로 손색이 없었다.
낙조봉 바로 아래에는 낙조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적석사에서 낙조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안전문제와 편의를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라 한다. 산의 일부분에 나무로 평평한 터를 만들어 놓아, 낙조를 감상하기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아무래도 크게 볼 거리 없는 단조로운 모양새의 낙조봉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그나마 이것저것 볼 거리도 있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전망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조금 나았다.
산이라서 그런지,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물러서기 싫은 겨울의 시샘인지 바람이 차가웠다. 해가 점점 기울어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석불의 얼굴도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그 뒤에 바위틈에서 피어나 하루 종일 바람에 시달리던 진달래 한 줄기, 마치 석양을 보기 위해 시간을 견뎠다는 듯 다시 붉게 꽃잎을 새롭게 단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해가 검은 산등성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함께 빛나던 모든 것들과 인연을 끊겠다는 듯이 결연한 태도였다. 사위의 만물이 숨을 죽였다. 바스락거리던 소리마저 종적을 감추고, 오직 바람만 휑하니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마치 떠나는 자의 말 없는 뒷모습이 남기고 간 흔적처럼.
어찌 그리 매정하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바위 틈에 피어나 이제 겨우 단장을 마친 진달래가 애달픈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살아서 맺은 인연 부질 없다. 매섭게 소매를 뿌리치며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그렇게 짧은 이별은 속절없이 끝나가고, 이제 모든 게 끝났음을 알리는 어둠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아, 이제 정말 끝인가. 진달래 꽃 즈려 밟고 떠난 태양은 다시 고개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 옛날 내가 고향을 떠나던 그 때처럼. 약속은 쉽게 잊혀지고, 언제나 함께 했다 해서 항상 그 자리에 있으리라 여길 순 없다. 언제 다시 고개를 내밀 것인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세상의 일이니까. 파르라니 떨리던 진달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직 희미한 석불의 미소만이 그 마음을 알아주리. 그들을 뒤로한 채 하산하는 길에, 나는 다시 기약 없는 내일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 한 시간 넘게 낙조를 기다렸다. 편하게 기다리기엔 낙조전망대가 좋았지만, 낙조봉에서 낙조를 보지 못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쩌면 낙조는 낙조봉에서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낙조전망대는 적석사가 낙조를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 한다. 낙조봉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는 낙조 또한 나름의 운치가 있다. 딱히 둘 중 어느곳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이유다.
▲ 해가 지기 시작하면 산과 바다, 태양이 만들어 내는 장관에 입을 다물고 눈으로 쫓기 바쁘다. 낮에 산 위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르게, 이곳이 섬에 있는 산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독특한 모습으로 일깨워 준다.
▲ 낙조전망대는 낙조 뿐만 아니라 산 아래 펼쳐진 아기자기한 모습들을 전망하기 좋은 곳이다. 시간이 쫓기거나 추위나 피로에 못이겨 낙조를 포기하는 상황이라도, 낙조대는 꼭 한 번 들렀다 가기 바란다.
▲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 온다. 어느 날이고 해 뜨지 않는 날은 없었지만, 오늘 이렇게 바라본 태양은 분명 어제 서로 무관심했던 그 태양과는 다르다. 그리고 내일 다시 떠오를 그 태양과도 분명히 다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