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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웨이'와 함께 따라간 '노르망디 코리안'의 행적잡다구리 2011. 12. 18. 20:50
사진 설명에는 한국인으로 판명된 사람이, 일본군으로 만주 국경에서 싸우다가 소련군에게 잡혔고, 다시 독일군에게 잡힌 후에 노르망디에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에게 잡혔다고 적혀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사진이 퍼지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논란이 일었고, 네티즌들의 검색에도 별다른 정보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급기야 SBS가 추정 경로를 따라 행적을 조사하고 나섰다.
SBS 스페셜 노르망디의 한국인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SBS 스페셜'에서는 이 사진에 나온 사람의 정체를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이 조선인(한국인)이라고 알려진 것은, 2차대전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스티븐 엠브로스(Stephen E. Ambrose)'의 'D-Day'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노르망디 코리안' 부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 101공수여단으로 참여했던 '로버트 브루어' 중위의 증언을 옮겨 놓은 것이었다. 그는 유타해변에서 4명의 동양인을 체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 사진의 주인공이고, 이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한다.
그 자초지종의 내용은 앞에서 말 한 것과 같이,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소련군으로 입대해서 독일군과 싸우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된 후, 다시 독일군이 되어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포로가 됐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D-Day라는 책 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저자인 스티븐 엠브로스와 브루어 중위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딱히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SBS취재진은 꽤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 냈는데, 그 사실들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 한국인(조선인) 중 일본군에 징집되어 끌려가서, '노몬한 전투'에 참전했다가 소련군에게 잡힌 사람들이 있다.
- 소련군 포로가 된 한국인들 중, 소련군에 입대해서 군인으로 활동한 사람이 있다.
- 독일군 포로 중 멀리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근처에서 왔다고 밝힌 한국사람들이 있었다.
- 독일군 노르망디 전선에는 '동방부대'라 불리는 동양인으로 구성된 부대들이 있었다.
- 미군은 노르망디 전투에서 동양인들을 포로로 잡은 사실이 있다.
이 사람이 조선(한국)에서부터 그 멀고 험난한 과정을 이어갔는지는 밝혀낼 수 없었지만, 그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 행적 중 일부에 해당하는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노르망디의 코리안 1 - SBS 스페셜 21회 2005.12.11
노르망디의 코리안 2 - SBS 스페셜 22회 2005.12.18
노르망디 코리안을 모티브로 한 영화, 마이웨이
강제규 감독은 이 SBS 다큐 방송을 보고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 '마이웨이 (My Way)'다. 이 영화는 사진의 그 인물이 조선(한국)에서 노르망디까지 그 험난한 길을 모두 걸었다고 전제하고, 그 안에 여러가지 영화적 장치들을 넣어 좀 더 영화다운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군에 징집당해 끌려가는 조선인 역할의 장동건, 일본인 장교 역할로 오다기리조, 그리고 일종의 중국인 레지스탕스 역할로 판빙빙이 등장해서, 한중일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 한다.
이 영화에서 김인권 씨는, 말 그대로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며 주인공인지 조연인지 헷깔릴 정도로 좋은 연기를 보인다. 그리고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카라'의 멤버 '니콜'도 영화에 잠깐 출연한다. 영화 초반에 손기정 선수가 육상연맹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니 눈 씻고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어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고 있고, 개봉하면 더 많이 나올 테니까, 여기서는 영화평 같은 것들은 집어치우고, 주인공의 여정을 한 번 따라가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물론 러시아 측이 아직 완전한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없는 등, 현실적으로 실화인지 아닌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전제로 두고, 여행자의 입장으로 그 여정을 한 번 따라가 보겠다.
사진 자료를 많이 쓰고는 싶지만 저작권 문제 때문에, 영화 '마이웨이' 사진을 중심으로 활용한다. 영화 '마이웨이'는 이벤트 당첨 돼서 시사회를 보고 온 것 뿐, 딱히 홍보한다고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하는 것 없으니 오해 말기 바란다. 사진을 갖다 쓰니까, 예의상 영화 이야기도 조금씩 넣겠다.
노몬한 전투 (할힌골 전투)
노몬한(Nomonhan) 전투는 1939년 일본의 관동군이 몽골과 만주의 국경지역에서, 영토 분쟁때문에 일으킨 전쟁이다. 유목민적 관습을 지키고 따르던 몽골 근처에 정착민적 사고로 만주국을 세우니, 자연스럽게 영토분쟁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몽골 유목민들은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형태의 '오보(ovoo)'라는, 일종의 종교적 표식이자 무덤이기도 한 상징물을 근거로 영토를 확인한다. 그런데 정착민족들은 주로 강이나 산 등을 중심으로 영토를 인식하므로, 자연스럽게 영토분쟁이 일어나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당시 관동군이 세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심의 핑계이기도 했고.
그렇게 시작한 전투는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소련군의 막강한 전차부대에 맞서, 일본군은 화염병으로 돌진했고, 보급품이 끊기고 전력이 밀려도 항복해서 포로가 되는 것은 금기시 됐기 때문에 자결을 택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다.
2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고, 그 중 1,700여 명은 생사가 불확실하다. 그 지역에서는 아직도 얼굴이 조금 다른 몽골 아이를 보면, 전쟁 당시 패잔병으로 숨어서 살게 된 일본군 아버지의 자식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리기도 한다고.
몽골과 러시아,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이 전투를 근처 강 이름을 따서, '할힌골 전투(Battles of Khalkhin Gol)'라 부른다. 몽골과 러시아 쪽에서 이 전투에 참가 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의 승리를 자랑스러워 하는데, 몽골과 러시아는 최근까지도 양국 우정의 상징 등으로 이 '할힌골 전투' 승리 기념행사를 행하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Battles_of_Khalkhin_Gol
http://en.wikipedia.org/wiki/Nomonhan
할힌골 전장으로 가는 길
'할힌골 전투'혹은 '할힌골(Khalkin Gol)'로 찾아보면, 이 지역은 현재 몽골의 영역으로 표시돼 있다. 그래서 정확한 전투지역을 찾아가려면 몽골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노몬한(nomonhan)'으로 찾아봐도 중국 쪽에 조그만 마을이 검색돼 나오기 때문에, 중국의 노몬한으로 접근해도 어느정도 이 지역을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몽골에서 할힌골(Khalkin Gol)로 여행한 여행기를 찾아볼 수도 있었고, 중국에서 노몬한(Nomonhan)으로 접근한 여행기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할힌골 여행기 (영어): http://soviet-awards.com/digest/kg1/On-the-Road-to-Khalkin-Gol-1.html
노몬한 여행기 (중국어): http://www.xcar.com.cn/bbs/viewthread.php?tid=7976492&extra=&showthread=&page=11
SBS 스페셜에서는 이 할힌골 전투지역을 찾아가기 위해 먼저 '슘베르'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갔다고 하는데, 지도에서 찾아보면 할힌골 전투지역 근처에 'Sumber'라고 적힌 마을이 있다.
주변 유목민까지 합쳐서 총 인구 4천여 명의 작은 마을이라 정보를 얻기는 어려운 곳이다. SBS에서 이 전투지역을 찾았을 때는, 마을 입구에 할힌골 전투 승리 기념탑이 서 있었고, 전장에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위령비가 있었다.
사실 이 '노몬한 전투'는 일본군이 전멸하다시피 한 부끄러운 전투라서 그 당시엔 이것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한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였다.
그러다가 몇년 전부터 일본인들에게 이 전투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루키의 여행법'이라는 책에 이 '노몬한 전투 지역' 여행기를 써 놓아서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다. 아마 그런 과정 속에서 일본인들이 위령비도 세우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억울한 조선인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이런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이 정말 있었는지 국가 차원에서 조사하는 등의 활동을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이 글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처이발상 (Choibalsan)
여러모로 뒤죽박죽 섞여서 짬뽕 같은 글이 되고는 있지만, 나름 독특한 컨셉이라며 좋게 생각하고 이제는 여행지로써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해 보자.
'할힌골 전투' 지역을 찾아가려면 일단 도르노드(Dornod) 지역의 슘베르(Sümber)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가야 한다. 그 마을은 도르노드 지역의 주도인 처이발상(Choibalsan)이라는 도시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있다. 아마도 처이발상에서 동쪽으로 중국 국경까지 쭉 전진하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처이발상'이라는 곳은 몽골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인데, 옛날에는 무역로 등으로 꽤 발전했던 도시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작은 지방 소도시로, 증가하는 실업률에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이라고.
딱히 볼 것도 없고, 정보도 없는 이 도시에는 '할힌골 전투'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여기는 울란바토르에서 항공편이 오가는 곳이므로 비교적 쉽게 찾아가서 '할힌골 전투'를 피상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울란바토르 (Ulan Bator)
울란바토르(Ulan Bator)는 '붉은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다들 알다시피 몽골의 수도다.
뜬금없이 울란바토르가 왜 나오냐 하면, '할힌골 전투'에서 생포된 포로들은 일단 울란바토르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물론 '마이웨이' 영화에서는 생략된 부분이지만, 여행길로 접근하거나 찾아가 보기엔 좋은 곳이라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도심은 걸어서 한나절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작은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이니 만큼 다른 곳보다는 여러가지 볼 거리가 있는 편이다. 그 중에서 이번 전쟁 테마에 맞는 곳 두 곳만 짚어 보자면, '몽골 국립 역사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Mongolian History)'과 '자이산 승전 기념탑 (Zaisan Memorial)'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자이산 승전 기념탑'은 소련-몽골 연합군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몽골의 사회주의 혁명을 기념하는 뜻으로 만든 것인데, 물론 여기는 '할힌골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하지만 사실 관광객에게는 그런 의미보다는 전망대로써 더욱 가치를 가지는 곳이다. 이 위에서는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몽골을 육로로 드나드는 방법
이쯤에서 몽골을 육로로 들어가고 나오는 방법을 알아보자. 왜냐고 묻지 마라, 내 마음이다. 조금 자세히 밝혀 보자면, 육로 세계일주를 꿈 꾸고 있어서 기회가 되면 이런 걸 자세히 조사하는 게 습관이라서 그렇다.
어쨌든 가장 쉬운 건 중국 베이징(북경)에서 기차를 타는 거다. 그러면 울란바토르까지 비교적 편하게 갈 수 있다. 그리고 울란바토르에서도 기차를 타면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다. 그러니 육로 여행에서 가장 편한 것은 기차다.
하지만 사서 고생을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좀 더 고생스러운 육로 이동 방법은 이렇다.
* 중국 국경도시: 이렌(얼렌, 二连, Ereen) -> 몽골 국경도시: 자민우드(Zamyn-Üüd)
* 몽골 국경도시: 알탄블락(Altanbulag, Selenge) -> 러시아 국경도시: 캬흐타 (Kyakhta)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몽골은 똑같은 이름의 마을과 호수 등이 전국적으로 많기 때문에, 지역과 위치를 확실히 잡아야 목적지를 제대로 검색해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최근까지의 소식에 따르면, 중국에서 몽골로 넘어갈 때는 걸어서 건너갈 수 없다 한다. 무조건 짚차를 타고 이동하도록 공안이 지시한다고. 그에 비하면 러시아 쪽 국경은 심사만 거치면 별다른 일 없이 그냥 통과할 수 있다 한다.
위에 적어둔 길은 대표적으로 널리 이용되는 육로인데, 익스트림 트래블을 즐기는 여행자들을 위해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중국과 몽골, 러시아를 넘나들 수 있는 국경이 조금 더 있긴 있다. 영어로 검색해보면 실제로 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나오긴 하는데, 그런 조그만 국경들은 언제 어떻게 사정이 바뀔지 모르고, 외국인들에겐 갑자기 갈 수 없다고 말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러시아, 치타 (Russia, Chita)
자바이칼스키(Zabaykalsky) 지역의 중심지로 바이칼 호수 동쪽 편에 위치해 있는 치타는, 옛날부터 일본, 중국 등을 경계하며 극동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사요충지다. 위에 '할힌골 전투'를 표시한 지도에서, 표시된 곳의 윗쪽을 보면 치타(chita)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때 잡힌 일본군 포로들은 울란바토르 임시 수용소를 거쳐서 치타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마이웨이' 영화에서도 일단 치타로 포로들이 이송되어 노역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치타로 나오는 곳은 사실 국내의 새만금 방조제 지역이라 한다. 이 지역에서 노몬한 전투, 소련군 포로수용소,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장면 등을 다 찍었다고.
어쨌든 SBS 스페셜에서는 치타의 바브쉬키나 거리에 있는, 사령부의 물품보관소가 옛날 포로수용소 자리라고 나왔다. 그리고 여기서 포로들에게 소련 군대(적군, 붉은 군대)에 입대할 것을 권했다 한다.
영화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일본과 소련이 포로교환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지만, 역사적 사실은 포로교환을 했던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웬만한 일본인은 다 본국으로 돌아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SBS에서는 일본군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힌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문서로 찾아내기도 했다.
치타는 지금도 넓은 지역의 중심지로 꽤 큰 도시임을 자랑하고는 있지만, 사실 여행자 입장에서는 그리 특별히 방문할 만 한 매력은 없는 곳이다.
'노르망디 코리언' 테마로 여행한다 해도 굳이 방문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여기서 몇 년 살면서 사진을 찍어 올린 영국인의 홈페이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생각이 조금 바뀔지도 모른다. 의외로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나는 조용한 도시 분위기가 살짝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풍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아, 나를 보내주면 좀 더 재미있게 다양하게 사진이랑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영국인의 치타 생활 경험기: http://www.siberia.eclipse.co.uk/
곁가지로, CIA 문서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에도 한국인이 이 지역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CIA문서: http://www.koreanwarpowmia.net/Sightings/CIA_Soviet_Transit_Camps.htm
모스크바 (Moscow)
'마이웨이' 영화에서는 관동군 포로들이 '쿤그르스크'라는 곳에서 강제노동을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 지명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치타, 옴스크, 페롬의 이동경로를 통해 포로들이 이동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이동했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쿤그르스크'는 찾을 수 없었지만, 나머지 지명들은 모두 시베리아 횡단 철도 경로상에 존재하는 지명들이다.
참고로 '쿤그르스크' 대신 '쿠르스크 (Kursk)'가 있는데, 혹시 이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 일어난 것으로 유명한 전투였다. 그런데 영화에서 싸웠다고 나온 지점이 여기가 아니므로 조금 애매하긴 하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Trans-Siberian Railway, TSR)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334 킬로미터를 잇는 대륙횡단철도다. 이 선로 위를 운행하는 열차는 6박7일 동안 총 60여 개의 역에 정차해서, 세계에서 가장 긴 직통열차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정차역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페름, 야로슬라블, 모스크바 등이다. 현재 북한의 평양까지 연결되어 운행되고 있다 하는데, 세상이 좀 더 좋아지면 부산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릴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스크바에서는 이 여정과 상관 없더라도 크렘린(Kremlin) 궁전은 꼭 봐야 할 것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 영화에서는 모스크바나 크렘린 궁전은 전혀 나오지 않는데, SBS 스페셜에서는 크렘린 궁전 안의 '무명용사의 묘'가 나온다.
이 무덤은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수많은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것인데, 결혼식 올리고 꽃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인상적인 곳이다. 많은 무명용사들을 대상으로 하긴 했지만, 특히나 '독소전쟁' 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이 여정과 연관지어 볼 수 있겠다.
쿤그르스크, 제도프스크
영화에서 소련군으로 전향한 포로들은, 군복과 총을 대충 받고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전쟁터로 나가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딱히 큰 의미가 없는 곳이다. 아마 실제 '노르망디 코리안' 행적에서도 모스크바에서 머물 시간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다. 치타에서 자바이칼 부대로 편입되어 바로 모스크바로 이동해서는 전장에 투입됐을 테니까.
여기서 잠깐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일본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말이 지원병이지 지역별로 할당량을 주고 강제징집 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할힌골 전투 (노몬한 전투)가 일어난 것이 1939년. 독소전쟁이 일어난 것은 1941년 6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독소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나라에 따라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영어: Eastern Front, World War II). 어쨌든 핵심 내용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1941년 초반에는 독일이 강하게 밀어부쳐서, 크렘린 30킬로미터 전까지 쳐들어갔지만, 그해 겨울 소련이 극동지역 부대를 옮겨와서 대대적인 반격을 펼치면서 독일은 힘을 점점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독일이 최종적으로 패전하는 것으로 끝난다.
만약 '노르망디 코리안'이 이 전투에 참전했다면 1941년 겨울이나 1942년 봄부터가 아닐까 싶다. 한창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무렵, 스탈린은 후퇴하거나 포로가 되면 반역자로 간주한다고 하면서 군인들을 몰아부쳤는데, 후방에는 '스메르시'라는 방첩부대가 도망치는 군인들을 쏴 죽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규 소련군이나, 포로에서 소련군으로 전향한 군인이나, 앞에는 적, 뒤에는 스메르시를 두고, 대부분 전장에서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 전쟁에서 소련은 그당시 인구의 1/10 을 잃었는데, 독일군 포로가 된 소련군만 해도 약 500만 명에 달했다 한다.
SBS 스페셜에서는 '독소전쟁'에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라며 '제도프스크'라는 곳의 전쟁유적지를 찾아갔다 (자막으로 한글로 나왔음). 그리고 '마이웨이' 영화에서도 이 '제도프스크'라는 곳에서 주인공들이 싸우는 것으로 나오는데, 문제는 이 지명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
가장 유사하고 그럴듯 한 곳으로 찾아낸 곳이 자돈스크(Zadonsk)다. 앞서도 말했지만, 영화에 나오는 지명인 '쿤그르스크'도 찾지 못했는데, 가장 유사하고 그럴듯한 지명으로 찾아낸 것이 쿠르스크(Kursk). 두 곳 모두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서로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고,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니까, 대략 이 쯤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독소전쟁'에서 가장 주목할만 한 치열한 전투는, 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일어난 쿠르스크다. 이 전쟁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돈스크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자돈스크(Zadonsk)는 지도를 축소하면 아예 지명도 나오지 않을 만큼 작은 시골 동네일 뿐이다.
만약 찾아간다면 쿠르스크에서는 프로호로프카 평야에 세워진 기념탑을 구경하면 될 듯 하고, 자돈스크에서는 그저 한적한 시골 동네의 산과 강에서 여유를 즐기면 될 듯 하다.
러시아의 웬만 한 동네에는 모두 전쟁 기념비 같은 것들이 있으므로, 자돈스크에도 그런 기념물을 볼 수는 있다.
독일, 베를린(Berlin)
영화에서는 베를린은 건너뛰고 바로 노르망디로 넘어간다. 그리고 SBS 스페셜에서는 소련군으로 싸운 동양인 포로들의 기록을 찾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김에 베를린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어느 부분에서건 이 '노르망디 코리언' 테마에서는 베를린은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500만 명에 달했던 소련군 포로들은 독일 내 140여 개에 달하는 포로수용소에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유대인 다음으로 싫어했던 종족이 슬라브족이었기 때문에, 소련군 포로들은 다른 포로들보다 훨씬 못한 대접을 받았고, 그래서 500만 중 거의 절반 이상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한다.
그런 인종차별 때문에 소련군 포로들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죽도록 내버려 두다가, 1943년에야 비로소 이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징집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 아시아계 사람들을 따로 분류해서 '동방대대(Ost Battalian)'를 만들었다.
처음에 동방대대는 소련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일의 동부전선으로 보내졌는데, 소련으로부터 민족을 해방한다는 명분도 가질 수 있어서 나름 잘 활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들 민족이 서로 뭉치고 단결하는 것을 싫어해서, 1943년 하반기부터는 동방대대를 서부전선으로 보내 대서양 방벽(Atlantic Wall) 건설을 하도록 했다. 그런 이유로 영화의 주인공과 '노르망디 코리안'은 결국 노르망디 해변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래도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타까우니까 이 테마에 맞춰서 볼거리를 넣자면, 베를린에서는 단연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과 '포츠다머 광장(Potsdamer Platz)'을 손꼽을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개선문으로, 옛날부터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군들이 지나간 문이다. 그리고 포츠다머 광장은 가끔씩 영화 같은 데서 독일군이 사열한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을 알리는 곳이기도 하고, 무너진 베를린 장벽으로 통일의 상징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SBS에서는 소련군 수용소 중 한 곳을 찾아서, 베를린 남쪽의 '자이트하인(Zeithain)'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2차 세계대전 때 꽤 큰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라 하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박물관 등이 남아있다. 물론 이곳은 그당시 크고 작은 포로수용소 중 규모가 컸던 것 중 하나일 뿐, '노르망디 코리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Normandy landings)
드디어 노르망디가 나왔다. '노르망디 코리언' 사진이 찍힌 곳이기도 하고, 영화 '마이웨이'도 여기서 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뜻 깊은 곳이면서, 이 긴 글을 드디어 마칠 수 있는 좋은 곳이기도 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Normandy landings)'은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독일군 전선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프랑스 북쪽의 노르망디 반도에서 벌인 상륙 작전이다.
맨 왼쪽에 쉘부르 항(Cherbourg)을 두고, 거기서부터 동쪽으로 각각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스워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원래 있던 이름이 아니라 암호명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중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은 '오마하'였고, 이곳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르망디 코리언'이 포로로 잡힌 곳은 '유타' 해변 근처였다.
어차피 해안으로 쭉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이라도 전투가 쉬운 곳은 없었겠지만, 그나마 유타는 오마하에 비하면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오마하의 경우는 어찌나 전투가 치열했던지, 항복하는 독일군까지 모두 죽였을 정도라 하니, 주인공이 여기 있었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테다.
동방대대가 독일군 군복을 입기는 했지만, 그 부대의 동양인들은 독일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주로 운전을 하거나, 동물을 돌보거나 벙커를 건설하는 작업 등에 동원됐다고 한다. 연합군에게 잡혔을 때도 말이 통하지 않아 심문이 어려웠다고 할 정도니, 거의 군인이라기보다는 잡역 일꾼으로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낫겠다.
노르망디(Normandy)는 파리 북서쪽, 영국을 바라보는 해안 쪽이며, 이곳에는 '유타 해변(Utah Beach)'이라는 이름의 길이 있다. 노르망디 해안 거의 전 지역에 그 당시 독일군이 만들어 놓은 대서양 방벽의 흔적들이 있고, 그것을 이용한 각종 전시물들이 있다. 그리고 유타 해변에 있는 한 D-Day 기념관 안에는 '노르망디 코리안'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 해변 안쪽에 있는 비교적 큰 마을인 '생 메흐 에글리즈(Sainte-Mère-Église)'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연합군 낙하산 부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내려온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마을 안에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념한 각종 전시관이나 박물관, 기념품 가게 등이 아주 많이 들어서 있다.
온 바다가 피로 빨갛게 물들었을 정도로 치열했던 전쟁터였던 그곳은 이제,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평화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해변이 됐다. 가끔 옛 기억을 되짚어 보려는 사람들이나, 영화 등에서 본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아직도 노르망디는 거의 서양인들의 전쟁으로 인식되어 서양인들만 찾아가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다.
사진의 주인공이 한국인인지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노르망디에서는 중앙아시아나 인도, 필리핀 등에서 끌려온 꽤 많은 동양인들이 독일군으로 편입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만큼, 이제 이곳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희생된 동양인들의 전쟁터로 재조명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이어지는 이야기
'노르망디 코리안'의 행적을 따라가는 일은 일단 노르망디에서 끝을 맺자. 포로로 잡힌 '노르망디 코리안'은 다른 독일군 포로들처럼 일단 영국으로 임시로 보내져서, 미국의 포로수용소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더이상의 행적은 밝혀진 것도 없고, 단서가 될만 한 것도 없다. 미국의 포로수용소도 한 두곳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어가는 것은 거의 소설에 가깝다.
어쨌든 미국의 어느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그는, 그곳에서 태평양 전쟁에서 잡혀 온 다른 조선인(한국인)들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비록 원치 않은 전장에 끌려 나와 포로의 신분으로 만난 사람들이겠지만, 오랜만에 많은 한국인들과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테다.
하지만 그는 다른 조선인들과는 달리, 소련군이었다가 독일군이 된 신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군 출신을 모조리 본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미국측에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인다.
스탈린의 이 요구는, 자국민을 불러들여 잘 살게 해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적국에 가담한 배신자로써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련으로 송환된 전쟁포로 중 15%가 소련에 도착하자마자 사형을 당했다 한다.
'노르망디 코리안'은 이 위기를 잘 넘겼을까? 그 난리통에 겨우 동양인 한 사람의 신변을 가지고 서양인들이 고심해서 잘 처리해 줬을까? 어쩌면, 역사적으로 큰 전쟁을 세 차례나 겪고도 살아남은 운 좋은 사람이므로, 이 고비도 잘 넘겼을지 모른다.
'노르망디 코리안'을 'D-DAY'라는 책에서 소개한 '스티븐 앰브로스'는 이런 추측을 남겼다. "그 사람은 아마 조선(한국)으로 무사히 송환 됐을 테고, 그 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에서, 남한 측에서 미국과 함께 싸웠거나, 북한 측에서 미국에 맞서 싸웠을 것"이라고.
한국전쟁까지 이 사람이 전장을 누비기엔 나이가 다소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이어진다면 정말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비극의 시대를 온 몸으로 맞이하며 살아간 사람으로 기록할 만 하다.
물론 거기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미 걸어온 길들 중 일부만이라도 충분히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가 아직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긴 했지만, 그 어지러운 시대 상황과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삭풍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인생을 나부끼면서도, 참 열심히 꿋꿋하게 살았던 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참고
* 별도로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사진들은 영화 '마이웨이' 사이트에 공개된 사진을 가져 왔음. (http://www.myway-movi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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