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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역사 여행 - 통감관저와 중앙정보부국내여행/서울 2012. 5. 16. 20:56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명실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한 곳이다. 그 유명한 남산타워를 중심으로, 케이블카와 도서관 등 각종 시설물들과 함께, 명동을 비롯한 주변 번화가들을 하나의 코스로 동선을 짜기 좋기에, 주말 데이트 코스나 간단한 나들이 등으로 자주 이용된다.
물론, 서울 토박이들 중에는 아직 남산에 한 번도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쨌든 남산은 주로 남산타워로 대표되는 서울의 중심이고 상징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어두운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곳 또한 남산이다.
일단 남산 어귀에 들어서면 산 꼭대기에 뾰족하게 올라선 남산타워에 눈길을 빼앗겨서, 빨리 저곳에 오르고 싶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십상이지만, 그곳에 오르기 전에 조금만 눈길을 옆으로 돌려보자.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역사의 현장들이 차마 그대로 잊혀지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 일당은 총칼을 앞세우고 서울을 점령했다. 시민들의 피땀으로 이승만을 물러나게 만든 419혁명이 일어난지 1년이 지난 때였다.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있었지만, 제2공화국은 내각제를 체택하고 있었기에, 국무총리인 장면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무기력하게 군부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렇게해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런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괴뢰정부가 수립됐다.
정통성과 정당성이 없었기에 주변 우방국들의 승인이 필수적이었고, 그래서 미국과는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협상을 하고, 일본과는 한일협정으로 협상을 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철저한 파시즘적 통제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넣은 정권을 장장 18년 동안 꼭 쥐고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본주의와 소련을 대표하는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대였기에, 미군이 주둔하며 입지를 굳혔던 남한은 철저한 반공사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빨갱이로 낙인 찍히면 때려 죽여도 괜찮다는 식의 야만의 시대.
그런 사회적, 시대적 분위기를 이용해서 체제에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도 모조리 빨갱이 딱지를 붙였고,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발굴하거나 만들거나 캐 내는 조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정, 중앙정보부였다. 수많은 간첩단 사건과 고문치사 등으로 악명 높은 바로 그 중정 말이다.
중정(중앙정보부)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도 1994년까지 남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 95년에 안기부 본청이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겨가면서 남산의 건물들이 서울시로 넘어갔는데, 건물의 용도는 여러모로 달라졌지만, 겉모습은 아직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남산 쪽으로 비탈길을 올라가면, 오른 쪽으로 적십자 건물이 보이고, 왼쪽으로 길이 하나 보인다. 대개는 계속 직진해서 남산 꼭대기로 오르지만, 왼쪽길로 꺾어 들어가면 바로 옛 중정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이 건물들을 중정이 이용하고 있을 때는, 일반인들은 이 삼거리에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면회 등의 이유로 중정을 찾아간 사람들은 모두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제는 마음놓고 들어갈 수 있지만, 그래도 뭔가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나는 건 기분 탓일까.
별 특별할 것도 없고, 아무런 멋도 없는 밋밋한 성냥곽 같은 건물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더욱 정이 안 가는 건지도 모르고, 아직도 여러 공공기관들이 건물들을 이용하고 있어서 좀 딱딱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길로 꺾어 들어가면 당장 몇 개의 건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들 중 하나가 바로 서울시 교통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tbs 건물. 이곳은 옛날에 수사와 행정기능을 맡았던 곳이라 한다.
안쪽으로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도시안전본부는 옛날에는 제 5 별관이라는 이름으로 학원 사찰을 담당하던 곳이다.
그리고 소방재난본부는 과거에 안기부 유치장으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이 곳 지하실에서 고문이 행해지기도 했다 한다. 물론 고문은 이 곳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 개의 건물이 한꺼번에 모여있는 것을 본 후, 길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서울 유스호스텔'로 가는 길이라는 표시를 볼 수 있는데, 이 길로 쭉 가면 또 하나의 역사적 장소가 나온다.
서울 유스호스텔 가는 길목 한 켠에 쓸쓸히 자리잡고 있는 '통감관저 터'. 통감관저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물론 체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강제로 이루어졌고, 왕은 완강히 반대하는 가운데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이 가서 도장 꾹 찍은 사건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났다.
원래는 관저답게 조선식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이렇게 터만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 그 터를 중심으로 '그들'은 권력의 심장부를 건설했다. 여기에 그런 자들을 끌어들이는 무슨 기운이라도 흐르는 걸까 싶어 한동안 서 있어봤지만, 별다른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말 그대로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바위 뒷편으로 돌아가보니, 그나마 이런 기념비라도 만들어 놓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아무리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이긴 하지만, 이렇게 소홀히 대한다면 또 까먹고 또 그런 일을 하는 자가 나오지 않을까. 공원도 좋고, 휴식도 좋고, 도심 속의 녹지도 좋지만, 최소한 이런 곳에는 기념관이라도 하나 지어서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그나마 이 터 주위에 오래된 큰 나무 두 그루가, 마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처럼 우뚝 서 있어서, 오래전 그 일들의 증인들로 서 있었다.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와 수령 450년의 느티나무. 그들은 아마 그 일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을 테다. 나라를 팔아먹는 자들과 또 피 흘리며 끌려간 사람들의 절규를.
지금에야 편히 쉬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리 마음 푹 놓고 있지는 못한 듯, 굳은 표정에 수심이 가득하다. 아마도 어느 고즈넉한 어두운 밤에 홀로 이 앞에 서면, 그 많은 이야기들을 실타래 풀듯이 하나하나 들려줄 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서울유스호스텔이 나온다. 지금은 청소년들의 숙박시설로 쓰이고 있다 하는데, 예전에는 중정 본관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이곳 지하로 해서 소위 '안기부 지하 벙커'라 불리는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곳은 개방을 하지 않는 듯 했다.
그나마 이곳이 청소년들을 위한 유스호스텔로 개조되어 쓰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일단 건물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바로 옆에는 제1별관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그건 폭파해서 허물어버렸다 한다. 차라리 리모델링 해서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썼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리 아프고 추하고 부끄러운 기억들은 재빨리 지우려 하는지.
사실 이 일대는 전체 건물이 모두 사라질 계획이었다. 2009년 서울시가 남산르네상스 계획을 발표했는데, 건물들을 다 없애고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전에 1996년에도 어두운 구시대 유물들을 청산하는 의미에서 이 일대 건물들을 다 없애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일단 시장이 바뀌면서, 2천 억이 넘게 드는 그 사업을 그대로 진행하지는 않을 텐데, 이제 어떤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찾아보며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역사적 장소로 만들었으면 싶다.
유스호스텔이 끝이 아니다. 유스호스텔 옆쪽의 터널을 지나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또 몇몇 건물들이 나온다. 한적한 길을 따라 오르다가 길 옆쪽으로 비켜 있는 건물에는 남산창작센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 건물은 요원들이 실내체육관으로 사용했던 곳이라 한다. 다른 건물들과 뚝 떨어져 있고,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연극이나 공연 같은 것을 하기에 딱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곳이 완전히 숲 속 길인 것은 아니다. 바로 옆쪽을 보면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넓은 도로가 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육교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로 앞쪽에 남산 터널이 보인다. 평소 별 생각 없이 지나다녔던 남산 터널 옆에 바로 이런 건물들이 있었던 거다.
이 다리를 건너서 쭉 가면 남산 한옥마을이 나온다 하니, 하루 날 잡아서 나들이 할 때 동선 짜는 데 참고 하시기 바란다.
계속해서 일부러 조금이라도 밝은 느낌을 주기 위해 꾸민 티가 역력한 터널을 지나면, 지금 서울시에서 남산 별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옛날에 제6별관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기도 지하실로 유명(?)했다 한다. 건물을 둘러보면 뭔가 비밀스러운 것들이 있을 듯 싶은 냄새가 확 풍기는 것이, 겉모습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 비단 이곳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곳은 지금 서울시에서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이미 새 시청건물을 완공한 상태다. 그래서 곧 이 건물을 비우고, 시청광장에 새롭게 지은 새 시청 건물로 옮겨 갈 예정인데, 그 후 이 건물의 사용 용도를 놓고 약간의 이견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기본 계획은 시민단체들에게 임대형식으로 내어 준다는 내용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더 알고 싶으면 스스로 노력해 보시라.
이렇게해서 짧은 '중정(중앙정보부) 투어'는 막을 내린다. 시청 별관을 끝으로 다시 길을 되돌아가도 되고, 아니면 계속해서 산길로 올라가면 남산타워로 향하는 길이 이어져 있다. 한 이십 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산책이지만, 지금은 이리도 쉽게 슥 둘러볼 수 있다.
사실 이 산책길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재미있거나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다. 건물 내부를 공개한 것도 아니고, 친절한 안내판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해설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는 사람만 알아서 느낄 수 있을 뿐이니까. 그래서 기본 지식이 없으면 그냥 밋밋하니 아무 멋도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만 눈에 보일 뿐이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들과 간첩단 사건 등을 조금이라도 알고 간다면 좀 더 의미있는 발걸음이 될 테다.
산책삼아 걸으면서도 참 안타까움을 많이 느끼는 길이다. 남산 탐방로 그림지도에도 아무런 설명이 나오지 않고, 건물 앞에 유래를 설명하는 게시판 하나 없는 실정이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왜 이러이러하게 꾸미지 않느냐라거나, 이러이러하게 하지 않느냐고 말 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찾아가서 행동하고 어울리고 또 데려가면, 세상은 저절로 그에 맞게 바뀌지 않을까.
남산의 잘 정돈된 산책로를 걸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냥 다 밀고 공원을 만드는 게 맞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사람들이, 시민들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만약 시민들이 역사 보존을 원한다면 스스로 나서서 정보 교환을 하며, 자원봉사 해설자로 나서기도 하며, 또 그것이 안 된다면 여기저기 자료들을 긁어모아 스스로 역사투어에 나서면서라도 지키려 하지 않을까.
밥그릇 빼앗기고 투덜대는 사람은 나중에 또 밥그릇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빼앗기기 전에 필사적으로 지키려 해야 쉽사리 빼앗으려 엄두를 내지 못하지. 그렇게 봤을 때, 이런 역사적 현장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되는지는 오롯이 시민들이 하기 나름이다. 그러니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것은, 시민이, 바로 우리가 만든 모습일 텐데, 그 속에서 나는 이런 모습을 원한다고 작은 목소리를 한 번 내어 보았다.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의미이니, 누군가 더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더 나가 주길 바란다.'국내여행 > 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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