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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비켜가는 아담한 카페,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국내여행/제주도 2013. 4. 12. 10:04
이곳을 방문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주도라는 전체적인 이미지에 비해서 딱히 볼거리도 별로 없고, 특별한 카페나 음식점도 하나 없고, 그래서인지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심심한 동네. 그나마 동네 안쪽으로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서 호젓한 분위기라도 풍기지만, 조금만 밖으로 나오면 큰 길 가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어서, 딱히 감상에 빠질 수도 없는 밋밋한 지역.
그런 마을 어귀에서 버스를 타려고 걸어가던 도중에 눈에 띈 작은 표지판. 처음에 '커피 테이크 아웃'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봤을 땐, 그저 작은 간이 시설물 하나 차려놓고 테이크 아웃 전용으로 커피를 파는 가게 하나 쯤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런 짐작은 이내, '아, 이런 곳에도 카페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라는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멀리서 볼 때는 가게 그림자조차 눈에 띄지 않던 낮은 지대에 마치 반지하처럼 들어 앉은 낮은 집. 전혀 예상치도 못 했던 장소에서 예상치도 못 했던 어떤 것을 보았을 때 생겨나는 호기심. 나를 이끈 것은 바로 그 호기심이었다.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카페는 첫만남부터 뭔가 언발란스 했다.
표지판과 입간판, 그리고 카페 밖을 치장한 그림과 장식물들을 보면 분명히 젊은 감각인데, 건물 자체는 아주 오래된 주택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보통 외지인들이 제주도에서 카페를 연다면 저런 집을 그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테다. 사실 카페라고 하기에는 좀 칙칙해 보이는 지붕 때문에, 그리 산뜻한 첫인상을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네 노인들이 찾는 다방이 아닐까 싶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데, 꾸며놓은 품새나 글자체 등을 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을 듯 한 분위기. 어쩌면 이런 이상야릇한 느낌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려고 했던 걸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내 정체가 밝혀진다. 일단은 젊은 사람이 운영하는 현대식(?) 카페다. 쉽게 말하자면, 최근 제주도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그런 종류의 카페가 맞다. 최소한 동네 사람들만 찾는 다방 같은 곳이 아니다. 정체 없이 길을 헤매는 이방인들도 쉽게 들어가 저린 다리 잠시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맞다. 그래서 일단은 안심이다, 좀 쉬어갈 수 있으니까.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이 카페가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주인장이 제주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집은 그녀가 어릴적에 살던 집이라 한다. 고향집 외관을 그대로 살려두면서 내부를 완전히 개조해 카페를 연 것이다. 아마도 오래오래 타지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아직 카페를 시작한 지 2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한다.
'이런 집을 어떻게 구했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벌써 몇몇 있었다고 한다. 선을 가르자면, 나도 그런 질문을 던질만 한 쪽의 사람, 즉 외지인이다. 물론 애초부터 이런 집을 사서 카페를 할 정도의 자금이 없어서 아예 엄두도 못 내는데, 그래서 그런지 외지인 입장에서 보기에는 고향에서 이런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참 부럽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태어나기를 잘 태어나야 하나보다. 물론 제주에서 태어났다해도 다들 이런 일을 할 만 하지는 않을테고, 또 이 카페 주인 역시 나름의 아픔이 있을테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 하나 쯤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운 일이다. 카페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 류의 서적들 속에서, 일단 태어나기를 잘 태어나야 한다라는 생각을 곱씹어보니, 씁쓸하기가 마치 들판에서 갓 따온 덜 익은 냉이와 같다.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핫초코는 담백하면서도 진했고, 함께 내 준 얼그레이 잼은 신선했다.
커피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커피 맛은 모르겠다. 핫초코 맛을 보니 아마도 음료들은 담백하며 무난할 듯 하다. 겉모양을 번듯하게 해 놓은 다른 카페들에 비해서 음료 값이 약간 싸다는 것도 장점이 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장점은, 길 가의 푹 꺼진 대지에 벙커처럼 위치해 있는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조용하다'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손님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에, 앞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특징일 뿐이지만, 이렇게 별 볼 것 없는 마을이라면 언제든 해가 지고 나면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딱히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거나 하지도 않으니, 놀러와서 시끌벅적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이 카페, 조용한 마을에 머물며 저녁녘에 한들한들 마실 나가며 들렀다가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분위기다. 그리 많다 할 순 없지만, 카페 여기저기 놓여있는 책들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수도 있을 테고. 물론 와이파이만 이용해도 한 시간은 금방 가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 카페는 아직 계속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 듯 싶었다. 아직은 조금 어수선하고 정돈되지 않은듯 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내외부로 장식해 놓은 것들도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 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그 미완성인 상태가 더욱 호감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미완성을 그대로 놔둔 채로 완성을 시킬지, 아니면 완성으로 바꾸어서 앞으로 나아갈 지, 나중에 다시 들러 확인할 수 있는 기대를 가질 수 있으니까.
사람에따라 별 특색 없이 그저 그런 카페라고 느낄 사람도 있을 테고, 사실 나 역시 딱히 큰 특징을 짚어보라면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해 줄 것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 조용한 마을에서 고즈넉이 머물다가 늘어지는 석양의 끄트머리에서 쉬엄쉬엄 찾아가 잠시 쉬다 올 수 있는 곳이라는 것. 바로, 관광이라는 강박에 빠지지 않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게으름뱅이인 사람)에게 어울릴만 한 곳이다.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청춘다락,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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