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라산의 설경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겨울 산행을 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저질 체력이거나, 새벽 일찍 눈을 뜰 수 없는 게으름뱅이 혹은 '그 힘든 걸 뭐하러 하나' 싶은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
막상 올라보면 좋을 것을 안다 하더라도 겨울 한라산은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가는데 드는 품 또한 수많은 귀찮음의 연속이다. 거기다 렌트카든 뭐든 자가용조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나름 설경다운 설경을 마음껏 즐기고 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렌트카를 하지 않더라도 버스 끊길 걱정도 크게 하지 않으며 간단하게 몇 시간 다녀올 수 있는 곳, 바로 '
1100 고지'다.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740번 버스를 타면 어리목, 1100고지를 거쳐 영실 매표소까지 간다. 이중에서 1100고지가 오늘의 목적지다.
마치 전쟁터의 작전명 같은 이름을 하고 있는 '1100 고지'는, 이름 그대로 해발 1100 미터에 위치해 있다. 버스 안내 방송에 따라 1100고지에서 내리면 다소 황량한 길 가에 내려서게 된다. 바로 앞에 보이는 휴게소 외에는 별다른 건물도 없다.
마치 공짜로 먹은 호떡처럼 그냥 버스 한 번 탔을 뿐인데 1100미터를 그냥 올라가서 설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생 없이 거저 먹는 설경이라 감동이 좀 덜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눈밭에서 뒹굴다보면 한 시간은 충분히 놀다 갈 만 하다.
740번 버스를 이용해서 오갈 때 주의할 점은 버스 시간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 제주도의 740번 시외버스는 동절기에는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한 시간에 한 대 정도 운행한다. 물론 이건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출발 시간 기준이다.
1100고지에서 막차는 4시 40분 정도. 영실 매표소에서 막차가 4시 36분에 출발한다고 돼 있으니, 1100고지에서도 그 시간 쯤부터 정류소에서 기다리는 게 좋다. 3시에 제주시에서 출발하는 막차를 타고 가서, 대략 한 시간 구경한 후에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방법도 괜찮긴 하지만, 버스를 놓칠까 싶어 좀 불안하다. 그러니 늦어도 낮 1시 쯤엔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내가 1100고지를 간 것도 늦게 일어나서 늦게 출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리목이나 영실에서 한라산을 올라보려면 최소한 낮 12시 전에는 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12시가 넘으면 못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데, 진짜로 통제를 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산행하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겨울철엔 낮 12시 이후엔 한라산을 오르지 않는 것이 좋다. 게다가 늦은 시간에 산행을 하면 내려와서 버스 막차를 놓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더더욱 엄두가 안 난다. 따라서 느즈막이 설경을 즐기려면 1100고지가 딱 좋다.
게다가 혹시 렌트카를 운전한다 하더라도,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차를 끌고 올라가기 좀 힘들다. 버스 타고 가다가도 오르막을 오르지 못해서 길 가에 퍼져있는 차들을 여러대 봤다. 스노우 체인을 감아도 눈길에 익숙치 않으면 별 소용이 없는 듯 하다. 물론 눈길을 잘 올라간 차들도 많았지만.
눈발이 한창 날리던 날이라 그런지 1100고지 휴게소에도 차가 별로 없었다. 성수기엔 꽤나 붐비는 곳이라 하던데, 이날은 차들이 열 대도 안 왔을 정도. 덕분에 더욱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눈이 날리면 1100 고지를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
1100고지엔 휴게소만 있는 게 아니다. 이 높은 곳에 습지가 있는데,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꽤 유명한 습지다. 이름은 '
한라산 1100고지 습지'. 습지 쪽으로 '자연학습 탐방로'가 나 있는데, 나무 데크로 걷기 좋게 만들어놔서 한 번 둘러볼 만 하다.
1100고지 습지는 휴게소 맞은편 도로를 건너면 바로 보인다. 제주시에서 버스를 탔다면 내린 곳에서 바로 습지 탐방로로 들어갈 수 있다. 탐방로 길이도 그리 길지 않아서, 쉬엄쉬엄 사진 찍으며 구경하며 걸어도 대략 30분이면 한 바퀴 빙 돌아서 다 구경할 수 있다.
물론 눈이 쌓였을 때는 눈길에 발이 푹푹 빠질 수도 있으니, 잘 미끄러지거나 편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
탐방로를 통해 습지로 들어가면 1100 고지의 설경을 더욱 잘 즐길 수 있다. 추우면 추울수록 사람들도 자동차나 휴게소에 머물기 때문에 탐방로가 더욱 한적해진다. 물론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 도움 청할 사람 없이 얼어 죽는다는 단점도 있겠지만.
그나마 사람이 좀 다닌 길은 다져져서 괜찮은 편인데,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은 눈이 꽤 쌓여 있었다. 저런 곳을 잘 못 디디면 그냥 무릎까지 푹 빠지니 조심.
탐방로를 따라 걸어가다보면 휴게소 쪽과는 다르게 칼 같이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주위에 딱히 바람막이 할 것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고, 한라산 바로 아래라서 산바람이 불어 그렇기도 하겠다. 바람이 세게 불 때면 나무 위에 쌓였던 눈들이 흩날리며 쏟아지기도 한다. 한 번에 툭 하고 뭉텅이가 떨어지기도 해서 참 시원하고 좋다. 장갑 없는 손으로 사진 찍느라고 손가락도 떨어져나가고, 코 끝도 얼어 터지고, 귀도 감각이 없어지고 참 좋다.
꽁꽁 얼어붙고 눈이 쌓여서 습지의 형태를 보는 건 좀 힘들지만, 탐방로를 따라 마치 산행하듯 설경을 즐길 요량이면 꽤 괜찮은 코스다. 습지 탐방로라서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평지이기때문에 그냥 산책삼아 슬슬 한 번 걸어가볼 수 있을 정도다.
탐방로 안쪽으로 들어가면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지점도 있는데, 이렇게 눈이 많이 오고 흐린 날에는 흐릿하게 보여서 카메라엔 잘 잡히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 본 것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어쨌든 눈 덮힌 한라산도 보인다는 거.
별로 설명할 것도 없이 사진밖에 없지만, 찍은 사진이 많아서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지는 글:
한라산 1100 고지 휴게소와 습지 탐방로에서 간단히 즐기는 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