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이미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상태. 근처에 게스트하우스 표지판 같은 것도 안 보인다. 오늘 산 비싼 지도책을 펼쳐봤더니,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캠프장 표시가 보였다. 가까우니 한 번 가보기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몰아 갔다.

 

그래서 간 곳이 바로 가미후라노(上富良野)의 '히노데 공원 (日の出公園)'. 한국어로 하면 일출공원이나 해맞이 공원 쯤 되겠다.

 

 

히노데 공원은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지역 공원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공원 치고는 규모가 좀 크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도 은근히 유명한 곳이더라. 일부러 구경하려고 찾아가는 관광객들도 좀 있고. 하지만 팜 도미타 같은 이 근처 다른 라벤더 공원과 비교하면 관광객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공원 입구로 들어가 관리사무소 처럼 보이는 건물로 가보니 관리인이 안 보였다. 바로 옆에 잔디밭이 보이길래, 저기가 캠핑장인가 싶어서 일단 간밤에 젖은 텐트 등을 꺼내 펴 말렸다.

 

이미 나보다 일찍 도착해서 관리인을 기다리고 있는 자전거 여행자가 한 명 있었다. 중국 선전에서 왔다고 하길래, 아 나도 거기 몇 번 가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기뻐하며 선전 어디어디 가봤냐, 어디가 제일 좋더냐 물어보던데, 아뿔사 말을 잘 못 꺼냈다. 선전은 육로로 홍콩 들어갈 때 몇 번 가서 하룻밤 묵고 오가는 정도였을 뿐, 딱히 뭔가 구경하려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말 했다. '몰라'. 몇 번 오갔지만 뭘 봤는지, 어디가 좋은지 몰라. 몰라. 몰라. 대화가 끊겼다.

 

 

그래도 같은 자전거 여행자니까 서로 여행해 온 길, 앞으로 갈 길에 대한 얘기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사람은 내가 돈 방향을 반대로 가고 있던데, 내가 요전날 쓸 데 없이 고생해서 넘은 산길을 가려고 계획을 짜놨더라. 얘도 구글맵만 보고 평지에 길이 없는 줄 알고 산길 국도로 갈 계획이었던 거다. 아이고 넌 구세주 만났다.

 

구글 지도만 보고 엉뚱한 길 고생하며 넘어간 이야기는 아래 글 참고.

 

> 구글 지도 보고 산 넘어 간 길이 삽질 - 홋카이도 자전거 캠핑 여행 3

 

 

지도책을 보여주며 이쪽으로 갈 때 자동차 전용 도로 옆으로 국도가 있다고 알려줬더니 무척 기뻐하더라. 대충 봐도 원래 계획했던 길은 빙 둘러가는 길이고, 산길이었으니까. 지도 일부를 사진으로 찍으며 계획을 수정하며 걔는 연구의 시간으로 돌입했다.

 

나중에 함께 캠핑장 가기 전에 고맙다며 유심칩을 하나 주더라. 홋카이도 올 때 미리 주문해놓고 공항에서 받은 데이터 무제한 유심칩인데, 자기 스마트폰과는 뭐가 안 맞는지 작동이 안 돼서 한 번도 사용 못 해보고 가지고만 있었다고. 무려 일주일 정도나 유효기한이 더 남아 있는 유심칩이었다. 이후에 그것 덕분에 문명의 혜택을 조금 보긴 했는데, 그러면 뭐 하냐 충전 할 데가 없어서 스마트폰을 맘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데.

 

 

그 자전거 여행자는 내 지도책을 보며 루트를 다시 짜는 시간을 가졌고, 나는 공원 구경을 했다. 어차피 공원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관리사무소가 내려다 보이니, 관리인이 오면 후다닥 뛰어 내려오면 되니까.

 

 

 

 

히노데 공원은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좀 볼 게 있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그냥 잔디 깔린 언덕일 뿐. 언덕을 올라가면 라벤더 꽃들이 심어져 있어서 그놈의 라벤더 꽃을 여기서 또 볼 수 있다. 어쩌면 수량으로만 보면 팜 도미타 같은 라벤더 공원들과 비슷한 규모일 듯 싶다. 근데 공간이 넓어서 오밀조밀한 느낌이 좀 덜하다.

 

홋카이도 후라노 지역의 라벤더 꽃은 대략 7월 중순 쯤에 만개한다고 한다. 내가 간 때가 7월 중순 약간 넘어서였다. 그렇다면 시기 상으로는 만개 시기가 맞긴 한데, 꽃들이 생각보다 듬성듬성 나 있었다. 만개를 해도 그 정도라면, 만개 시기 놓쳐서 가면 참 억울하겠구나 싶다. 여기 히노데 공원 쪽은 다른 꽃밭보다 라벤더가 오래 펴 있을 때가 많다고 하니, 딴 데서 꽃이 다 져 있다면 여기로 가 보는 것도 좋겠다.

 

구글맵에서 히노데공원 치면 아마 나올 테고, 카미후라노 기차역에서 대략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걸어가도 괜찮을 거리다. 길을 잘 잡으면 꽤 큰 마트와 세이코마트 편의점도 있다.

 

 

 

좀 위로 기어 올라가야 이런 것들이 보인다. 꼭대기는 바람은 많이 부는데 햇살이 따갑다.

 

 

꽃밭도 꽃밭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더 좋았다. 사실 뭐 그리 감탄할만 한 경치는 아니지만, 시골 동네 모습을 한 눈에 담아보는 시원한 기분. 넓게 시야가 탁 트이면 어디라도 일단은 좋으니까.

 

 

 

 

언덕 위에는 저렇게 하얀 아치 구조물이 있고, 거기 종이 하나 달려 있다. '사랑의 종'이라는 이름의 아치인데 나름 그리스 양식이라 한다. 종에 달린 줄을 당겨서 종을 울려볼 수 있다. 연인이 저 종을 울리면 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냥 종을 울리면 종 소리가 난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한 번 이상 다 잡고 흔들기 때문에 시도때도 없이 땡땡 울리는데, 종소리가 너무 경박해서 난 별로더라. 이 근처에 '사랑의 우체통'도 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좀 더 높은데서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 보나 들어가서 보나 비슷했다. 어차피 이 주위가 다 평지라서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저 멀리까지 다 보이니까, 조금 더 올라간다 해봤자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창문으로 다 막혀 있어서 덥기만 덥고.

 

공원과 전망대 모두 입장료는 없었다. 나중에는 또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입장료 없이 이 정도 구경이면 꽤 괜찮다 싶었다. 여긴 딱히 매장 같은 게 크게 있지도 않아서 상업적인 냄새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 근처 라벤더 공원들에 비하면 사람이 적어서 한적해서 좋았다. 라벤더를 구경하려는 목적보다는 그냥 한적한 공원을 산책한다는 느낌으로 간다면 괜찮을 곳이다.

 

 

 

 

 

 

 

 

언덕 위에서 놀다가 여기저기 꽃밭도 좀 헤집고 다니려던 순간, 아래를 보니 관리인이 온 것이 보였다. 서둘러 내려갔더니, 야영장은 여기가 아니란다. 공원 밖으로 빙 돌아서 뒷쪽으로 좀 더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서 중국인 자전거 여행자와 함께 자전거를 몰고 캠핑장을 찾아 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찾아가기 쉬운 길이었는데, 처음 갈 때는 약간 헤맸다. 얘는 미니벨로 크기의 자전거에, 뒤에 할매들 시장 갈 때 쓰는 작은 손수레를 달고 다녔는데 의외로 속력이 빨랐다. 짐수레가 뒤에 달려 있어서 기동력이 그리 좋진 못했지만, 그 대신 엄청난 스피드로 전진하더라. 역시 자전거는 엔진의 힘이 중요하단 걸 느꼈다.

 

이 공원은 이후에 딱 한 번 더 찾아왔지만, 히노데 공원 캠핑장에는 대략 일주일 정도 있었다. 여기를 베이스 캠프로 삼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전기 충전할 곳이 딱히 없다는 것 빼고는 꽤 괜찮은 곳이었다.

 

Posted by 빈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