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하면 살기 가득한 눈빛과 비장한 마음가짐, 절제된 행동과 단호한 결단 그리고 시퍼렇게 날 선 칼날 등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여태까지 많은 이야기들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줬고, 서양에서는 거기다 동양에 대한 환상까지 더해 좀 더 멋있고 신비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무라이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다. 아내는 죽고, 노모는 치매기가 있으며, 어린 두 딸은 밥벌이 할 만한 나이가 아니다. 가장으로써 자기 혼자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군주의 창고에서 근무를 하긴 하는데, 말단 사무라이에게는 충분치 않은 급여이다. 그래서 부업으로 곤충집도 만들고 집에서 밭도 갈고 장작도 팬다.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 직장에서는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칼퇴근을 하는데, 그래서 붙은 그의 별명이 '황혼의 세이베이(칼퇴근)'이다.
이런 상황을 보더라도 이 사람은 이름만 사무라이이지, 여태껏 봐 왔던 사무라이 영화에서 봐 왔던 그런 사무라이가 아니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시대 상황 마저도 막부 말기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제목 그대로 황혼의 사무라이라 할 수 있다. 결투를 해도 뭉둥이로 대적하고, 형편 때문에 칼도 팔아버렸고, 병 들어 죽은 아내의 마지막 말이 제발 출세하라였던 그 사람. 정말 아무리 말단 사무라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듯 싶다.
거기다가 소꿉친구였던 토모에가 남편의 학대 때문에 이혼하고 돌아와서 그녀와의 로맨스까지 벌어지는데, 무사다운 화끈함과 강인함으로 확 휘어잡는 그런 로맨스가 아니다. 보통 사무라이 영화였다면 적들을 물리치고 여자를 구해내고 어쩌고 해서 확 넘어오게 하는 게 정석 아닌가 말이다.
영화 제목만 보고 영화를 기대한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사무라이 주인공이 고생 끝에 적들을 해치우고 노을 지는 황혼의 길을 멋있게 떠나는 그런 것을 상상할 만 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무라이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무라이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열심히 일 하고, 애들 키우고, 식구 먹여 살리며, 가난 때문에 구멍난 버선 신고 다니며 사랑 앞에 절절 매며 어려워하는 그런 사무라이의 모습들. 이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무라이 영화이기 때문에 칼싸움이 있긴 있는데, 그것마저도 '칼을 쓰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라는 주인공의 시대 철학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다소 멋 없는 싸움이다. 따라서 다른 사무라이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멋있는 액션 장면 보다는, 한 아버지로써, 아들로써, 남편으로써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대부분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그 모습이 낮설지 않은 친근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족들을 위해 몸 바쳐 일 하는 우리 아버지들이 바로 사무라이들 아닌가. 목숨과 마찬가지인 인생을 내 걸었다는 것이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큰 감정 기복 없이 천천히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영화 내용을 따라가다보면, 색다른 사무라이의 모습 속에서 삶에 충실한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느낌은 마치 화려하게 이쁘진 않지만, 꼼꼼하게 잘 빚어낸 투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막그릇 하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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