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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엄마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악성 빈혈로 수시로 그랬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항상 그렇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숨 쉬는 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걱정은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꼬박꼬박 학교를 가는 일 뿐이었다.

좁은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돈이 없다며 무엇이든 아끼려 했고, 일찌감치 그걸 보고 자란 나도 크레파스 하나라도 아끼려 애 썼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도 이왕이면 구름 많은 하늘을 그렸고, 농촌 풍경을 그려도 언제나 흰 연기를 많이 그려 넣었다. 흰색은 굳이 칠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그 전날도 밤새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끝내 말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것을. 돈 천 원이면 갈치가 세 마리였고, 갈치 세 마리면 우리식구 일주일치 반찬이었다. 그런 돈을 선뜻,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씩이나 또 가지고 오라고 했다고 말 하기가 미안했다. 아니 미안함보다도 불만이었다. 천 이백 원짜리 색연필 한 세트 사지 못해 학교에서 매 맞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던 나에게, 천 원이라는 돈은 정말 그리 쉽게 남에게 건네줄 만 한 금액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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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조례 시간 시작하자마자 평화의댐 성금 걷기부터 했다. 이미 삼일 째. 낼만 한 친구들은 다 냈다. 아직까지 내지 않은 사람은 세 사람 뿐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있다는 걸 모두 다 아는 꼬질꼬질한 녀석과, 덤벙덤벙하면서도 좀 삐딱하고 반항기 있고 싸움을 일삼던 문제아 녀석, 그리고 나.

선생님은 아침부터 특별지도를 시작했다. 생활보호대상자 녀석에게는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했다. 다른 모금에서 녀석은 항상 면제였다. 선생님도 당연하게 생각했고, 학생들도 당연하게 생각했고, 자기 자신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 봐줄 수 없다 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때렸다. 안 가져올 때마다 매일 곱하기 2. 삼일째니 4대를 맞아야만 했다.

껄렁껄렁한 녀석에게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한숨만 내쉬며 긴 말 없이 매만 때렸다. 이 녀석은 그 어떤 모금에도 항상 뒤늦게 돈을 가져오는 녀석이니까.

그리고 나. 나에게는 그 껄렁껄렁 녀석보다 더 짧게 한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니는 와 안가져오노." 딱 한마디였다. 그리고 조용히 매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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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일년에 네댓 번 학생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말, 연초에는 불우이웃돕기, 여름 즘에는 수재민 돕기, 그리고 연말이 다가오면 의무적으로 사야만 했던 크리스마스 씰.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없는 폐품도 어떻게든 만들어서 내야만 했던 폐품수집도 수시로 있었고, 스승의 날 선물도 의무적으로 반 아이들이 돈을 내야만 했으며, 심지어 어린이날 행사라며 빵 하나 우유하나 주는데도 다 학생들 돈을 걷어서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 때는 모두들, 학생부터 시작해서 선생님, 학부모들까지도, 그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래야만 한다는 듯,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듯,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이상하다 생각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하루는 학교에서 TV를 틀어줬다. 아침자습 시간이었는지, 수업하던 도중이었는지, 아니면 특별활동시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선생님이 TV를 틀어줬던 것이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우리 집 TV는 당장 갖다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조그맣고 아주 낡은 흑백 텔레비전이었다. 물론 그 때만 해도 흑백텔레비전 구경하기는 정말 힘든 시기였다. 심지어는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그 녀석 집에도 작기는 하지만 컬러 TV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시청각 교육’이라며 틀어주는 컬러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굉장히 좋아했다. 일단은 컬러고, 화면도 크고, 일상 정규 방송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특히 비 오는 체육시간에 잠시 틀어주던 WWF가 좋았고, 가끔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고 자습시간을 줄 때, 애들이 빌려온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도 좋았다. 심지어 아침마다 영어교육이라며 한 이십 분 잠깐 틀어주는 초등용 영어 비디오 테이프까지 넋이 빠질 정도로 집중해서 봤더랬다.



그런 용도의 학급 텔레비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보여준 것은 아주 생소한 화면이었다. 가끔 집에서 뉴스 시간에 봤던 것과 비슷한 내용.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상세하고 위기감 있는 편집. 언젠가 안보교육관인가 하는 곳에 견학 가서 봤던, 그리고 요약문 안 써오면 엎드려 뻗쳐 상태에서 엉덩이를 죽도록 때렸던, 그런 내용과 아주 흡사했다.

그 내용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았던 63빌딩의 절반이 물에 잠기는 모습과, 서울이 커다란 호수로 변해버리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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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내가 돈을 갖다 내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가 월요일이었던 건 확실하다. 남은 건 나 하나 뿐이었다. 뺀질이도 돈을 냈고, 생활보호대상자도 돈을 냈다. 그런데 평소에 별 문제 없이 조용하고, 공부도 좀 한다는 녀석이 말썽이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일그러진 선생님 얼굴. 말 안 해도 눈치챌 수 있었지만, 당신 입으로 털어 놓았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을 순서대로 불려가며 한 소리씩 들었노라고. 그 정도는 예상했다. 요즘 애들 영악하다 흔히들 말 하지만, 글쎄다. 우리동네 아이들은 그 당시,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촌지가 뭔지, 어떤 식으로 건네주는지, 어떤 부모가 주는지, 왜 주는지, 주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다 알고 있었을 정도다.

이미 각오했던 터였다. 이미 매도 맞을 만큼 맞았다. 하루에 곱하기 2를 하면, 5일이면 32대, 10일이면 1024대다. 그 정도 계산은 할 수 있었고, 이미 각오도 돼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말이 나올 줄도 알았다.

“어머니 모시고 오너라.”

엄마는 병 때문에 거의 매일 자리에 누워 있으시다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밤늦게 들어오신다 했다. 선생님의 한숨. 그리고 정적. 시침 돌아가는 소리. 그것이 기억에 남은 모두다. 그 날 그 불림이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나는 부모님을 모셔 가지도 않았고, 끝까지 돈을 내지도 않았다.

그렇다, 나는 갈치 세 마리를, 라면 열 개를, 우리식구 식량을, 그들로부터 지켜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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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달 후, 또 성금을 걷었다.

‘저번에 그 댐 알제? 아직 돈이 모자라서 못 짓고 있단다…’로 시작해서 결국은 또 모두 천 원씩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학급회의에서도 ‘모두들 한 마음 한 뜻으로 동참하자’라는 결의가 채택되고, 박수가 나왔고, 학급일지에 그 내용이 적혔다. 그 때 주번이 나였다.

이번에도 나는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저번처럼 나 혼자만 남지 않게 된 것이 문제였다.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서 말 하시기를, 저번에 내가 안 내고 지나간 것을 아이들이 안다 했다. 그래서 저렇게 버티는 애들이 많아졌다고. 한 눈에 봐도 저번과 상황이 좀 달라진 게 사실이었다. 오십 명 조금 넘는 인원에 십여 명이 돈을 안 내고 버티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선생님도 어떻게 감당할 수 없다 했다.

우리 반은 문제의 학급을 찍혀버렸다. 그리고 그 주동자로 내가 찍혀 버렸다. 나는 억울했다. 급우들에게 돈을 내지 말자라고 말 한 적도 없고, 모금에 대해 일체 어떤 말도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나는 하루에 학교에서 말을 세 마디 하면 많이 한 축에 속했다. 별로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책을 읽었고, 사람들은 그걸 또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니까. 나는 홀로 조용한 섬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내가 주동자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성적이 좋다라는 이유와, 매년 한 두 개씩 외부에서 상을 타 온다는 이유 덕분에 별도로 어떤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보통 그렇게 찍히면 교무실이나 학생상담실 등으로 불려가 따로 ‘교육’을 받기 마련인데 말이다.



열흘이 넘었던가, 보름이 지났던가, 우리가 단체로 받은 ‘교육’은 그 동안 받았던 ‘교육’의 총집합이었다. 손바닥 맞기는 이미 장난이었고, 손가락 관절 맞기, 발바닥 맞기, 종아리 맞기, 엉덩이 맞기 등등 각종 매를 다 맞았다. 게다가 수업시간에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책상 들고 있기도 했었는데, 한 여자애가 쓰러지면서 옆 친구의 머리가 다치는 바람에 그건 거의 폐지되었다.

그래도 우리의 ‘교육’은 ‘돈’을 가져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침마다 체크해서 원산폭격, 그리고 잔소리, 복도에서 무릎 꿇고 의자 들고 있기, 쉬는 시간에는 벽 보고 서 있기, 수시로 오리걸음으로 복도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기, 수시로 어디든 한 대씩 맞기 등등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리고 청소는 무조건 우리들이 해야 했고, 청소 끝나면 반성문을 써야 했고, 반성문 쓰면서 한 명씩 불려가 ‘상담’을 받아야 했다.

상황이 장기화되자 우리는 전교 문제아로 지적되어, 실내를 벗어나게 됐다. 운동장에서 차렷자세로 몇 시간 동안 서 있기, 운동장 몇 십 바퀴 돌기, 어깨동무하고 운동장 돌기, 어떤 때는 무조건 운동장을 계속 돌라 해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만 지시를 내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반 체육시간에 공 주워오기, 물 떠 오기, 체육 시설물 옮기기 등의 잡다한 일들도 해야만 했다.



다 괜찮았다. 그 정도 즘이야 매년 운동회 준비 기간에 늘 하던 것이었으니까. 다른 학교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우리학교는 여름방학 중간 즘 되면 전원이 학교에 나가야만 했다. 방학 중이었지만 마치 개학한 것처럼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와야만 했는데, 그 모두가 가을운동회 준비 때문이었다.

운동회 준비라곤 하지만, 실제로 쓰이는 율동이나 차전놀이 준비는 개학하고 나서부터 시작됐다. 그 전에 하는 것은 ‘기초 다지기’. 지각하면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아야 했고, 줄을 똑바로 맞추지 않으면 발길질을 당했다. 앞으로 가, 옆으로 가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도 바로 발길질을 당했으며, 잡담하다 들키면 바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리고 매 시간마다 제일 못 한 반을 뽑아서 벌을 세웠다.

여름 땡볕에 운동장에서 차렷자세로 한두 시간 서 있는 건 기본. 매 한 바퀴 때마다 한 명씩만 빼내 주고, 나머지는 계속 운동장을 달려야만 하는 죽음의 레이스도 있었다. 엎드려 뻗쳐는 장난일 뿐. 태도가 좋지 못하다 찍히면 운동장에 머리 박고 뒷짐지고 있기도 해야 했고, 때론 그 상태에서 이른바 원산폭격이라는 것을 당할 때도 있었다. 물론 남자여자 모두 한데 섞여서 말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태도가 안 좋았던 팀은 마무리로 오리걸음 하며 쓰레기 줍기. 그리고 정리, 청소, 문단속. 운이 나쁘면 밤에 집에 들어가야 하는 날도 많았다. 다시 말 하지만, 이건 중고등학교 때 이야기가 아니라 국민학교 때 얘기다.



돌이켜보면 참 끔찍하고 무서운 시간이었지만, 그 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했고, 아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뭐 어쨌든 다 괜찮다. 그 때 우리학교는 '그냥 몸으로 때우지 뭐'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몸으로 때우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손바닥 몇 대 맞는 것 즘은 잘 타이르는 것 정도에 해당할 뿐이었으니가. 그래 다 괜찮았다. 그 정도야 몸으로 때우면 되고, 몸으로 때우는 거야 시간만 가면 되니까.

그런데 고통스러운 건 매일 저녁마다 억지로 써야 하는 반성문이었다.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 가난해서 돈을 못 가져오는 것이 죄인가. 반장, 부반장과 함께 각 부 부장들은 일반 '평민'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갖다 냈다. 그들은 이만큼 씩이나 냈는데, 왜 너는 안 내려고 하냐라고 하면 정말 할 말이 없긴 했다. 그 때만해도 그런 것에 이유를 생각해 낼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나는 돈이 있는데도 안 내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정말 돈이 없어서, 아니 있긴 있지만 그 돈이 내겐 너무나 귀중해서 못 내는 거였다. 안 내면 어떤 힘든 상황을 겪을 지 충분히 예상하고, 또 실제로 그걸 감수하면서도 지켜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반성문에 이런 논지로 글을 썼다. '가난해서 죄송합니다'. 
반성문을 들고 찾아가 일대일 면담을 할 때, 선생님은 항상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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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장학관들이 온다 했다. 선생님은 우리 때문이라 했다.
“교감, 교장선생님도 다 만나보더니 이제 장학관님들도 만나보겠네, 좋겠네.”
이미 험상굳게 변해버린 표정이 풀릴 날이 없던 선생님은, 자포자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했다.

정말로 우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올 때가 돼서 온 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정말로 방문했다. 그리고 우리가 벌 받고 있는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좋은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리고 학생주임 선생님이 우리 모두를 부르더니, 이제 큰일났다 했다. 내일까지 안 가져오면 우리들 아버지 직장에 통보가 간다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가혹한 체벌에 지쳐버린 아이들은 크게 동요했다.



물론 중간에 ‘돈’을 내고 ‘대열’을 이탈한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장난처럼 그들을 배신자라 불렀지만, 학교에서의 그 ‘노동’이 끝나면 다시 동네에서 공 차고 노는 친구들일 뿐이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딱히 어떤 연대감이라던가 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일종의 게임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 버티기 게임.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는 ‘노동’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천 원’을 벌기 위한 육체적 노동. 비록 큰 성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아버지 회사에 통보가 간다는 말에 우리 모두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나도 애지중지하던 저금통을 깨어 그 더러운 돈 천 원을 갖다 냈다. 우리는 그렇게 교실로 ‘복귀’했고, 학교는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못내 억울했다. 원통하고 분했다. 아마 그 때부터 였을테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사정 따위는 전혀 봐 주지 않는 ‘괴물’들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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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평화의댐’을 보았다.
서울 쪽 사람들은 학창시절에 견학을 가기도 했다지만, 내가 살던 부산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수학여행도 기껏해야 경주 정도로 갔을 정도였으니까.

댐은 그냥 댐이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이, 별로 눈에 띄는 것도 없이.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서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끌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나도 옛날에 여기 모금한다고 해서 돈 냈는데 하는 소리가 얼핏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그 뿐. 흐르지 않는 강 위에 세워진 콘크리트 계곡이 그 모든걸 먹어 삼켰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북한이 공격하면 나라가 어찌되는 지 봤잖아' 라는 선생님의 말에, '서울만 물에 잠기잖아요' 라고 대꾸했던 나. 그리고 뺨을 맞았지. 이기적이라는 소리와 함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둥, 사람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둥,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는 둥,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둥, 그런 소리를 들었었지.

풉- 생각하니 쓴웃음만 새어 나온다. 누가 누구에게 그런 소릴 할 수 있었던 건지. 정녕 하늘에 부끄럽지 않았던 건 과연 누구였던 건지. 도심 변두리 조그맣고 가난했던 한 학교를 그렇게 만든 것이 ‘평화’ 때문이었다니. 미소가 번진다. 웃음이 나온다. 폭소가 터진다.

퉤-!
나는 평화의댐에 침을 뱉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던 침은 이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마치 오백 원 짜리 동전 두 개로 보였다.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저 아래 더러운 것들이 삼켜버렸다. 마치 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다시 침을 뱉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 차라리 글을 쓰기로 했다.


Posted by 빈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