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쾌청한 주말 오후의, 어두컴컴 칙칙한 미술관 놀이.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는 2000년에 시작해서 격년제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다. 올해(2010년) 6회째를 맞이해서, '미디어 시티 서울'이라는 행사명으로 열리고 있다. 행사기간은 9월 7일부터 11월 17일까지.

입장료 무료라는 이유만으로, 집에서 뒹굴거리느니 새로운 거라도 하나 더 보자는 심산으로 발길을 향했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바글바글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그리 붐비지 않아서 관람 분위기도 괜찮았던 편.



서울시립미술관/2010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 시티 서울 2010




미술관 건물 입구에 큼지막하게 QR코드를 붙여놓은게 눈에 띄었다. 작품 안내 브로셔에도 QR코드가 붙어 있었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각 작품 설명서에도 저런 QR코드가 붙어서, 따로 헤드셋을 대여하지 않아도 작품 설명을 볼 수 있게 되겠지. 작품에 따라서는 작가 개인의 홈페이지로 들어갈 수 있게끔 QR코드가 붙기도 할테고.

하지만 미디어아트를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QR코드를 많이 활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좀 안타까웠다. QR코드까진 바라지 않는다, 브로셔에 작가들 홈페이지나 블로그 주소만이라도 좀 적어줬으면 좋겠다. 없는 사람은 어쩔수 없다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없지는 않을텐데, 브로셔에 적혀있는 건 작가의 집주소(혹은 작업실 주소) 뿐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팜플렛을 나눠주는 직원이 뜬금없이 "FIFA U-17 여자월드컵 축구 우승"이라고 말 했다. '뭐냐, 얘는?' 하며 뜨악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것도 하나의 작품이란다.

매일 일회적으로 사용되는 신문 머리기사를 말 해서, 관객들의 답변이나 반응을 기대하는 것. 미술관에서 일반적으로 겪을 수 없는 의외의 상황을 접하면서, 스스로 미술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라고 팜플렛에 쓰여져 있었다.

너무 이상적이다. 나만 그런가? 미술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기엔 장치가 너무 미흡하다.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작품일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큰 의미 없을 작품이다.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은 관람객들에게 너무 많은것을 기대하거나, 너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이 늘 그렇듯이, 모든 작품들이 다 내 관심을 끌지는 않는다. 물론 내 관심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는 않을테다. 작품감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거니까.

이번에도 내 눈에 띄는 작품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양아치'라는 작가의 '밝은 비둘기 현숙씨_경성'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화면 두 개를 이용해서 퍼포먼스 장면을 보여주는데, 촬영기법(?) 또한 독특했다. 사실 주제가 뭔가 보다는 표현형식이 눈길을 끌었던 작품.



무간도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미술관 한 귀퉁이 모습

영화 무간도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미술관 한 귀퉁이 모습




이번 행사의 주제는 'Trust'였다. 그 신뢰라는 것이 '미디어아트'라는 것과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디어와 신뢰라는 주제로 결집된 분위기였다. '미디어 시티 서울'에서는 '트러스트(신뢰)'의 개념을, '나날이 복잡해져가는 관계의 소통방식'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미디어의 확장된 형태는 정보를 왜곡하고, 메시지를 불투명하게 한다. 광고는 일상생활이 되었고, 고독감은 집단화되었으며, 대중주의는 민주주의를 대치하였다. 
 미디어 시티 서울은 트러스트를 통해 미디어의 광범위한 의미를 해석하고, 트러스트를 유동적 영역들 내에 사회참여의 수단으로 제안한다." 


브로셔에 나와있는 설명처럼, '신뢰'는 하나의 소통방식이다.




확장된 미디어는 광고를 지향했고, 이제 우리는 미디어에 나오는 음식점 소개 하나 믿을 수 없게 됐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미디어들. 이 매체들은 '신뢰'를 기반으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사회참여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를들면 블로그나 트위터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신뢰'라는 것은 '불신'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뢰가 불신의 반대말이라 생각된다면, '의심'이라는 단어를 써보자.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뢰를 10으로 놓고, 불신을 0으로 놓은 일직선상의 어떤 점수가 아니다. 신뢰에는 불신이 늘 뒤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예를들자면 소셜 네트워크 수단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시작한 블로그들이, 이제는 더이상 전폭적인 신뢰의 수단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전에 지식검색 서비스가 그러했고, 그 전엔 QnA 게시판이 그러했다. 

요즘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그 뒤를 잇고 있지만, 그런 매체들도 이미 광고와 개인정보 유출, 써드파티와의 정보 공유, 그리고 그것을 악용하려거나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활동 등으로 점점 신뢰관계에 의문이 파고드는 실정이다. 언젠가는 그것도 '불신'의 영역에 가까워질 테고, 그러면 또 다른 무언가가 생겨나겠지.

 

그걸 단순히 '미디어 탓'으로 돌릴수 만도 없다. 잘 생각해보면 일상 속의 '관계'와 '소통'도, 언제나 '신뢰'와 '의심'과 '불신'이 공존하고 있느니까. 신뢰했던 어떤 것(혹은 사람)이 어느순간 불신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신뢰하고 있는 것의 어느 일부분은 신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만날 때에도 항상 의심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으며, 불신으로 만난 타인도 신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애초에 인간세상의 문제인걸까. 아직 알 수 없다. 현대의 예술들이 그토록 '소통'을 외쳐대며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그런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앞으로도 계속해서 탐구해 나가야 할, 이 시대 예술사조의 큰 화두일 것이다.






마주보는 화면 속에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로 상반된 시각으로 말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기의 입장을 말 하고 있는데, 관객은 그 사이에서 양쪽의 말을 모두 듣는 입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막상 그 사이에 서 보면, 상반된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싸움 정도로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이 시대, '중재자' 역할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일률적으로 일처리를 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편파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사이에서 두사람 모두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대단한 거겠지. 부디 그런 사람이 정치판에 나와주길 바란다.






미술관 1층에는 많은 작품들이 있고, 공간도 넓게 잡혀 있어서 사람도 많았다. 반면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공간도 좁고, 작품수도 적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관객 수도 적었다.

이번 비엔날레는 서울시립미술관 뿐만이 아니라, 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 서울역사박물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등에서도 함께 펼쳐지고 있다. 주제는 모두 같지만, 작품 수로 봐서는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이 당연히 제일 많다. 
 


사람들이 집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교회를 짓는다







'위성, 그것이 하늘을 향하고 있기만 하면'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2009년 이란 선거 당시 TV 방송국의 상황을 담은 영상물이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이런 사회, 시사적인 내용의 작품들이 많았던 것이 특징.

'이란 선거'는, 한국인들에게는 안드로메다에서 외계인이 똥을 쌌다라는 것 만큼이나 별 관심 없는 주제. 하지만 잘 보면 한국 상황과 비교도 되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픽션인지는 모르겠지만, 홈쇼핑 방송에서 물건판매를 중단하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악몽'이라는 작품은, 현재의 침체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복귀하기를 촉구하는, 선동적인 연설 장면.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벽과 탑'은 그 부름에 대한 응답의 영상. 내 세계관으로는 작품의 진의를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기에 기억에 남았다. 
 


표적살인




'표적 살인'이라는 작품은 단지 흑백사진 몇 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구성만 보면 아주 단순한데, 그 내용이 꽤 충격적이었다.

표적 살인은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테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반 이스라엘 세력들을 암살하는 행위이다. 물론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지를 받으니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 찍힌 사람들은 반 이스라엘 세력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 물론 그중에는 반 이스라엘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사람들을 골라서 찍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찍은 것 뿐이다.

그런데도 사진에 찍힌 인물들의 모습들은 모두 하나같이 위험인물들로만 보인다. 이스라엘 방위군이 암살할 때 주로 사용하는 특수렌즈를 사용해서 찍은 사진이라 그런 것만은 아닐테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가 행할 수 있는 '힘' 아닐까. 깊이 생각해보면 굉장히 섬찟한 내용이다. 



이외에도 인상깊었던 작품으로 '스테이크 하우스', '이스라엘 하이파의 조립식 주택', '강냉이 그리고 뇌 씻기' 등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끌림이었으므로 자세한 감상과 설명은 생략하겠다.


 

공동체




미술관 건물 밖에는 '아날로그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야외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것은 '미디어 시티 서울' 비엔날레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주제따위 생각하지 않아도 그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조형물들이다. '미디어 아트'라는 다소 복잡하고 까다로운 작품들을 관람하기 싫은 분들에게도 잘 어울릴테다.

팁 하나를 알려드리자면, 들어갈 때는 먼저 이 작품들을 무시하고 들어가라는 것. 일단 미술관 안의 작품들을 다 구경하고 난 다음, 밖으로 나와서 머리를 식히며 이 작품들을 구경하면 한결 더 산뜻해 보일 테니까.






얼굴에 철판을 깐 양들 (제목은 '수면양')




혼자 구경하는 관람객들도 많으니, 솔로라고 주눅들지 말자




이 즘에서 이번 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 번 하자면, 아무래도 '미디어 시티 서울' 행사가 이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사실은, 현대미술 전체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 라고 말 하고는 싶지만, 현대미술을 그렇게 많이 접한 것도 아니고, 올해 열리는 행사들을 많이 찾아가 본 것도 아니니까 그건 일단 접자.

어쨌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비엔날레는, 격년제로 열리는 행사 치고는 조금 실망이었다. 저번과 비슷한 구성과 비슷한 소재, 비슷한 매체들이 등장해서 일단 식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실망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고흐의 그림도, 모네의 그림도 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식상하거나 지루하진 않으니까.

문제는 아마도, 점점 더 많은 작품들이 '영상'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일테다. 아시다시피 미술관은 극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쾌적함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영상물 관람은 오롯이 관람객의 인내심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영상작품이라는 것이 전체 전시물의 대부분을 차지해버리면, 관람객의 인내심은 감당을 할 수가 없다. 아마 수퍼맨도 반도 못 보고 나가떨어질테다. 이건 작가들과 기획자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꿈-평안을 위하여




꿈꾸는 달팽이




어쨌든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고 투덜대기보다는, 하나라도 뭔가를 배워오는 것이 이득이다. 애초에 대부분이 영상물로 이루어진 현대미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안 가면 되는 거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런 행사가, 그것도 무료로 공개된다는 것은 크게 환영할만 한 일이다. 어찌됐든 이런 전시회를 통해서 뭔가를 하나라도 배우거나, 영감을 얻거나,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든지, 혹은 호기심을 충족시킨다거나, 색다른 아이디어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든가 하는 등의 이득이 분명히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것은, 관람자가 얻으려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몫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런 전시장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거라면, 차라리 그냥 극장에 가는게 낫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연인과의 마지막 데이트를 즐겨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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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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