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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상을 살아간다. 사실은 자기들도 걱정 돼 죽겠으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애써 태연한 척 하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트리면서. 그러면서도 다들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다고, 떨리긴 왜 떨리냐고,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래서 싸이가 필요하고, 트윗이 필요하고 페북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내 자신이 봐도 한심한 현실의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좀 더 나은 나 자신을 만들어 스스로 보기에도 흐뭇한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넌 왜 그리 바보같냐고 외치고, 넌 왜 그리 쿨하지 못하냐고, 왜 그런 짓을 하냐고, 왜 그리 사냐고 말을 쏟아 붓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여류소설가의 소설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 있다. 가난한 사람의 적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자기보다 좀 더 가난한 자를 찾아서 욕을 하고, 자기보다 좀 더 못 난 사람을 찾아서 흠집내고 비웃는 사람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신이 바닥이 아님을 인지하고, 남을 밟으면서 안도감과 쾌락을 얻는다고.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일종의 대리만족이랄까. 아마도 그 소설가는 정말 가난을 겪어 본 사람임에 틀림 없다, 나 역시도 백 프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런 행위는 자기 스스로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시적인 안정감은 얻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물질적 가난을 마음의 가난으로, 마음의 가난을 영혼의 빈곤으로 전이시키는 비겁한 현실도피일 뿐이다.
다들 알기는 안다, 명확히 인식은 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저 깊숙히 자라나는 무거운 한 덩어리 짐처럼 그렇게 알기는 안다. 차라리 떨리면 떨린다고 털어놓고 마음 터 놓을 상대를 찾아 수다를 떨다가, 마침내 찾아온 위기의 순간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용감한 것임을. 하지만 그럴 정도의 용기도 내지 못하니까 아닌척 하는 비겁함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소녀는 비겁하게 떠났던 과거를 잊고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토록 하고싶은 일을 위해,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사람들 속에 섰다. 과거를 기억하고 실수를 들추어 비웃는 사람도 있고,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엄청난 성공신화처럼 자신의 약점을 초인적인 힘으로 극복해 낸 것도 아니다. 단지, 약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초연하게, 묵묵히 내 갈 길을 가고자 다짐했을 뿐이다.
그런 소녀가 연주하는 피아노 곡은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곡 치고는 무척이나 밝고 화사한 이 곡은, 라벨이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그의 전우들을 위해 만든 곡이다. 아마도 소녀는, 그리고 감독은, 스스로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전우들을 위해 이 곡을 택했을 테다. 소녀에게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어도, 최소한 그 밝은 미소에 언제나 햇볕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어찌됐든 전진, 또는 전진이다.
p.s.
최고은 씨 사건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나는 단지 그 화제의 틈바구니를 이용해 기회를 잡기 위한 가식이 되지 않기 위해 이제서야 이 글을 올린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이 글을 볼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만 하겠다.
그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다들 뭐라뭐라 떠들었다. 대부분은, 아니 내가 찾아본 모든 글들은, 현재 우리나라 영화산업 시스템의 문제, 영화 배급사의 횡포, 예술인들에 대한 구제책이 없는 나라에 대한 비난, 그리고 사회 안전망에 대해, 이 나라에서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렇다, 그건 넋두리일 뿐이다. 말 안 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그렇게 말만 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는 참 비겁하다.
사회에 대해, 국가에 대해, 시스템에 대해 거대담론을 펼치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진 않는다. 하지만 다만, 그 전에 스스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좀 행동했으면 싶다. 그렇게 말만 하고는, 세상이 이런걸 뭐, 라고 푸념만 늘어놓고 다시 거대 자본이 만든 오락거리를 즐기러 가면 용서를 받을 줄 아는가. 최고은 씨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라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바로 우리니까, 결국 우리도 그녀의 죽음에 일조 한 거다. 조금이라도 문제의식을 느꼈다면 제발 인디문화에 관심 좀 가졌으면 한다. 여기에 대해 또 뭐라뭐라 하겠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이것 밖에 없는 걸 어쩌겠나.
우선 나부터 이제 거대자본이 만든 영화는 돈 내고 안 볼 작정이다. 물론 수고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좋은 작품은 돈 내고 보는게 맞겠지만, 그 모든 작품에 돈을 내기엔 내가 가진 자원이 부족하다. 그래서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볼 돈으로, 인터넷 인디영화관에서 인디영화 네 편 보는 방법을 택한 거다. 이건 내가 택한 한가지 대안일 뿐이니, 아무쪼록 그 사건에서 진심으로 슬픔을 느낀 분들이라면 스스로 알맞는 대안을 좀 찾으시기 바란다. 수많은 대안이 나오고, 수많은 통로가 생길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할 수 있다고 본다.
누군가 그러더라. 대안이 없어서 우울할 땐 대안을 생각하면 된다고.
최고은 감독의 격정소나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http://youefo.com/film/film_view.html?idx=464
인디다큐페스티발 2011: http://sidof.org/
독립영화 다운로드 서비스, 인디플러그: http://www.indieplug.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