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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명전, 정동길에 있는 을사조약 현장국내여행/서울 2019. 1. 12. 17:58
정동길의 정동극장 옆으로 작은 길이 하나 있다.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만 한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나온다.
구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에서 중명전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듯 하지만, 그 길은 사용할 수가 없고, 빙 둘러서 정동극장 옆길을 이용해야 한다. 아무래도 미국대사관저 때문인 듯 하다.
중명전은 바로 그 유명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곳이다. 아관파천과 그 이후 이어진 사건들을 쫓으며, 구한말의 분위기를 느끼는 정동길 테마 코스 중 하나로 들러보자.
현재 예원학교와 미국대사관저에 둘러싸여 있는 중명전은, 원래 덕수궁에 속한 고종의 서재로 지어졌다. 덕수궁을 황궁으로 정비해가며 규모를 넓히면서 여기까지 건물을 지었다. 덕수궁에 큰 불이 났을 때는 고종이 이어하면서 편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하면서 덕수궁과는 뚝 떨어진 모양새가 됐다. 그마저도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로 사용됐고, 70년대에는 민간에게 매각되는 등, 수시로 건물 용도와 소유주가 바뀌면서 원형을 완전히 잃었다.
2006년에야 문화재청의 관리 하에 들어왔고, 2007년에 덕수궁에 편입됐다. 후에 복원을 해서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지금도 2층은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실로 쓰고 있어서, 관람은 1층만 가능하다.
현재 중명전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위 사진에 나와 있는 시간에 맞춰서 가면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중명전을 관람하려면 바깥에 비치된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한다. 여름에 맨발에 샌들 신고 가면 좀 찝찝할 것 같으니, 여기 갈 때는 양말을 신고 가도록 하자.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1층 뿐이고, 전시관 규모도 작은 편이라서, 설명 없이 둘러본다면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다. 입구에 딱 들어서면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현장 모습을 재현해놓은 방이 제일 먼저 눈에 띄고, 그 방 벽면에 을사조약 사본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을사조약 문서에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다. 그래서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다. 체결 당시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다 하지만,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을사늑약 등의 다양한 명칭이 사용된다. 일반에선 을사조약과 을사늑약 용어로 수시로 논란이 일기도 한다.
'을사조약'은 을사년에 체결되어서 붙은 명칭인데, 이것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불평등하게 불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강조하는 명칭이 '을사늑약'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둘 다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나도 한때는 을사늑약이 더 맞지 않나 했지만, 한 친일파 인사가 "을사늑약이라 불릴 만큼 강제적인 것이었으므로, 친일파도 피해자로써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논지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그 후로 그냥 을사조약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결정했다. 가치판단이 들어간 용어는 역이용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을사조약이라는 표현을 쓴다 해서, 이것이 마치 정당한 조약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조약이라는 단어 자체에 정당하다는 의미는 없다. '강압적인 부당한 조약'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된다. 단어 그 자체보다도, 이것이 어디서 체결됐고, 어떤 의미가 있고, 그 전후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아는게 더 중요하다.
1905년 11월 17일 저녁부터 18일 새벽까지, 중명전에서 을사조약 체결 회의가 있었다. 당시 중명전 일대는 일본 군대가 쫙 둘러싸고 있었다 한다. 회의장에는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 공사가 있었고, 대한제국 대신 8명이 참석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은 반대의 뜻을 밝혔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찬성했다.
이때 찬성을 한 5인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하고, 대표적인 친일파이자 나라 팔아먹은 인물들로 여긴다. 그런데 이때 반대를 한 사람들도 나중에 다 작위 받고, 돈 받고 했으므로 딱히 나은 인간들도 아니다.
이 자리에 있었던 인물들 중, 오직 '참정대신 한규설' 만 나중에도 일제가 주는 작위를 거절하고 부끄러워했고, 조선교육회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고종도 이 조약 체결을 앞두고 "협의하여 처리하라"라는 애매한 말을 해서,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면모를 보여줬다. 물론 이전에 시간을 끌면서 열강들의 도움을 바라는 듯 한 모습도 보였지만, 이미 일본은 미국과는 필리핀과 조선을, 영국과는 인도와 조선을 각각 점유하는 것을 인정하는 협약을 맺었고, 러시아와도 일본이 조선을 점유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해둔 상태였다. 이후에 이 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한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유약하고 정세 판단 못 한 것은 좀 거스기하다.
을사조약은 대한제국(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이 골자여서, 이제 실질적으로 주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통치 하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떻게든 외교로 어떻게 해 보려했던 당시 조정 입장에서도, 주체적으로 외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실제로 나라가 망했다는 의미였다.
그 후에 띄운 승부수가 바로 헤이그 밀사.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희의에 밀사가 파견됐다. 이들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평리원 검사 출신 이준,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이었다. 헤이그 특사는 여기저기 문을 두드리며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회의장 참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고종은 강제로 퇴위됐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별다른 성과 없이,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라는 결과만 얻었을 뿐이지만, 세계 평화를 위한 회의라는 만국평화회의의 위선을 폭로하는 사건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전시관 한 가운데에는 대한제국 고종의 황제어새 복제품도 전시되어 있다.
중명전 내부 전시실은 작은 편이고, 볼 것도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둘러보면 십 분도 안 돼서 나올 수 있다. 중간에 해설 시간이 겹쳐서 약간 들어봤는데, 너무 을사조약의 불법성에 비중을 많이 두고 많은 설명을 하는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물론 그 설명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만 그렇게 오랜 시간 설명을 하기보다는, 그 당시 여러가지 상황들, 국제 정세 등을 종합적으로 알려주는게 더 좋지 않을까.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사건도 너무 분노 등의 감정을 자극하면 사람들이 엉뚱한 쪽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수도 있으니, 좀 더 종합적인 상황 판단을 할 수 있게끔 정보를 주는게 좋다고 본다. 물론 설명문을 작성하는 쪽에서 일정의 의도를 가지니 그게 어려운 경우가 많겠지만.
아, 어쨌든 구한말 테마 여행을 하니까 결국 갑갑해지는구나. 이제 좀 벗어나서 정동길을 걸으며 기분전환을 해야겠다. 이 갑갑함이 피부로 와 닿는 것은 아무래도,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이기 때문일 테다. 그렇다고 내가 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찬 바람 맞으며 길거리나 쏘다녀야지.
중명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는 구 신아일보 별관 건물이 있다. 신아일보는 1980년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됐다. 이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건물이라고. 내부는 리모델링 해서 각종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정동공원 올라가는 입구 쪽에는 캐나다 대사관이 있다. 예전에 하남호텔이 있던 자리이고, 그 전에는 손탁호텔의 주인인 손탁이 집을 짓고 살았던 곳. 손탁호텔 터는 이 맞은편에 있다.
캐나다대사관 바로 앞에는 500년이 넘은 나이의 회화나무가 있다.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인데, 1970년대엔 도로 확장을 이유로 자르려고 한 것을 주민들이 지켰다고.
수차례 도로 확장 공사와 재포장을 해서, 캐나다대사관 건물을 지을 때는 거의 고사 직전이었지만, 나무에 신경을 많이 써서 건축한 결과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지금은 좀 위태한 모습이지만, 여름에 가면 시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회화나무는 잡귀를 물리친다는 설이 있으므로, 정동길 걷다가 시간 되면 이 나무 아래서 잡귀를 좀 떨치고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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