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동남아 삽질 여행 55 2/2
에필로그
방콕 람부뜨리 거리에 있는 람부뜨리 빌리지 입구에는 오전에만 장사를 하는 오렌지 주스 아줌마가 있다. 반투명 플라스틱 병에 오렌지 주스를 담아서 '오렌지 주스 텐 밧'이라고 외치며 장사 하는 아줌마.
사실 방콕에는 그런 오렌지 주스 파는 곳이 많다. 어떤 가게에서는 직접 오렌지를 짜서 만들면서 팔기도 하는데, 오렌지를 거꾸로 세워 놓은 컵에 꾹꾹 눌러 짜서 그걸 그대로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판다. 설탕이나 기타 다른 첨가물이 일절 들어가지 않은 완전 100% 자연산 오렌지 주스.
마시면 온 몸으로 퍼지는 오렌지 주스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방콕에서는 거의 입에 달고 다닌다. 크기에 따라 10밧, 25밧(혹은 30밧) 하는데, 10밧 짜리 두 개 사 먹는 게 조금 낫지만, 귀찮아서 25밧 짜리 큰 병을 사 먹는다.
이왕이면 맛있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려고 여기저기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며 사 마셔봤다. 그래서 결국 정착한 곳이 람부뜨리 빌리지 앞에 있는 아줌마의 오렌지 주스. 사실 그런 류의 오렌지 주스는 맛이 다 비슷비슷 한 편인데,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은 얼마나 신선한가이다.
잡다한 물건들을 함께 파는 가게나 노점에서 사 먹는 오렌지 주스는, 얼음에 보관하긴 하지만 그래도 며칠 묵은 것이 있기 때문에 맛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이런 오렌지 주스는 방부제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상온에 반나절만 그냥 놔 두면 상해버린다. 그러니까 만든 지 얼마 안 된 주스를 마시는 것이 제일 맛이 좋은데, 람부뜨리 빌리지 앞의 이 아줌마는 매일 아침에 나와서 거의 다 팔리면 집에 가 버리기 때문에 매일 신선한 주스를 들고 나온다.
그렇게 미묘한 맛의 차이 때문에, 방콕만 가면 하루에도 몇 번 씩 찾아가서 주스를 사 먹고 해서, 이제 아줌마도 나를 단골손님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옆의 노점상들에게 '내 단골손님'이라고 소개도 해 주고. 그래서 이젠 맛이 아니라 아줌마를 보러 일부러 찾아가게 되었다. 카오산 밖에 머물러도 이 아줌마의 오렌지 주스 때문에 카오산을 갈 수 밖엔 없겠지. 지금 내게 방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아줌마와, 이 아줌마의 오렌지 주스다. 지금도 얘기 하면서 입에 침이 고인다.
상인들도 사람이다. 아주 당연한 소리다. 특히 방콕 람부뜨리 거리에 있는 상인들은, 대체로 손님이 없을 때는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때 딱히 물건을 사지 않아도 다가가서 수다를 떨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다가 의외로 생각지도 못 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물론 손님 많을 때는 실례겠지만.
길에서 책 파는 노점에서 '부탄' 가이드 북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한 상인과 대화를 나눴다. 부탄은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라서 열심히 자료를 수집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인에게서 부탄 국왕이 태국에 자주 오고, 자기도 부탄에 가 봤다는 말을 들었다. 부탄은 아직 폐쇄적인 곳이라 여행하는 데 까다롭고 돈도 많이 드는데 어떻게 여행할 수 있었을까. 물어보니 동남아 사람들을 위한 비공식적인 루트가 있다고 한다. 이런 어설픈 정보에 의지해서 다음 여행 계획을 짜 보는 것도 재미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여행 하다 만난 사람들도 그렇고,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확실한 정보를 수집 해 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수집한 정보가 좀 맞지 않으면 막 헤매면서 당황하고 급기야 화를 낸다. 하지만 가이드 북에서 안내하는 길만 쭉쭉 따라간다면, 그건 자유로운 여행이 아닌 것 아닐까. 진정 자유여행이라면, 정말 자유롭게 한 번 해 보는 건 어떨까.
예전엔 태국의 세븐일레븐에서 100밧 짜리 TOT 전화카드를 팔았는데, 요즘은 LENSO 카드만 판다. 가격도 300 밧, 500 밧으로 비싼 것들만 판다. 그런 전화카드를 팔면서도 가게 앞에 LENSO 공중전화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게 바로 앞에 전화기를 두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
특히 쑤코타이에서는 세븐일레븐에 가서 LENSO 전화기는 어디서 사용할 수 있냐고 물으니까, 시내의 시장 근처에 2~3대 정도 있다는 답변. 렌조 카드는 방콕 말고는 사용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태국에선 최대한 TOT 전화카드를 구입하는 게 좋다.
때때로 사람들은 배낭여행과 패키지 여행, 혹은 여행과 관광을 구분하면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무시하는 듯 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과 관광을 구분지으면서, 여행자가 관광객보다 보다 고상하고 더 대단하고 좋은 것 처럼 말을 하기도 한다. 더우기 여행을 하다보면, 장기여행자로 한 일 년 돌아다닌 것이 단기여행자로 일주일 여행 한 것 보다 더 대단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전제로 둔 상태에서 오가는 대화들도 많다.
이런 게 과연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과연 배낭여행이 패키지여행보다 좋은 거라고 그렇게 쉽게 말 해도 되는 걸까.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무 자르듯 쉽게 잘라 말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여행이 관광보다 나은 이유라는 게 모두 타당하기나 한 걸까.
배낭여행이든 패키지여행이든, 장기여행이든 단기여행이든, 여행이든 관광이든,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남들 피해 안 주고 뭔가 얻어 갈 수만 있다면, 아니 그저 잠시 쉬어 갈 수만 있다해도 나름의 의미를 느낄 수만 있다면 다 똑같은 것 아닐까. 어차피 집 나오면 다들 여행자, 아니 인간은 누구나 여행자니까, 그런 구분 없이 서로 인정해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솔직히 나는 이제 피곤해서라도 돈만 있으면 패키지 여행을 하고 싶다. (돈이 없어서 배낭여행만 하고 있다고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여행에 대한 정의는 많다.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은 새로운 자신을 찾아 떠나는 길이다라는 것. 정말 흔히, 자주 쓰이는 말이다.
그것 말고도 여행에 대한 정의는 많은데, 여행은 자기가 살아야 할 곳에서 태어나지 못 한 사람이, 자신이 살 곳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여행은 일상이다, 여행은 휴식이다, 삶의 재충전, 숨 쉬기 위한 일탈, 낮 선 것들과의 만남,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등의 말들이 있다.
딱히 정답이 없는 것이고, 딱히 생각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에 딱히 의미를 두거나 정의를 내리거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한 마디로 정의 해 보라면, 내게 이번 여행은 '치료'였다. 병원에서 치료중인 사람을 백수가 아니라 환자라고 부르듯이, 세상 속에서 여러가지로 지친 자신을 치료 해 가는 사람을 여행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테다.
안타까운 점은, 완전히 치료되기 전에 여정을 접어야 했다는 것인데, 몇 십년 간 쌓아 온 상처들을 온전히 치료하려면 한두달 가지고는 역부족일 듯 싶다. 그래서 다음 번엔 좀 제대로 치료를 해 보고 싶다. 이대로는 정말 더 이상은 힘들 테니까.
요즘은 휴대전화를 로밍 해 가는 사람들도 많던데, 로밍 해 간 전화는 걸려 온 전화를 받을 때도 요금이 나간다. 그래서 로밍폰으로 온 스팸전화를 받으면 사람들은 미칠 듯이 화를 내기도 한다. 쓸 데 없이 비싼 돈을 낭비 한 꼴이니까. 그래서 로밍 폰으론 걸려오는 모르는 전화번호는 아예 받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로밍을 안 하는 나 같은 사람들도 그런 스팸전화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입장이긴 마찬가지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면 이상한 번호가 뜨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화를 잘 안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밍폰의 경우는 그래도 아는 전화번호는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공중전화로 전화 거는 입장에서는 참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냥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거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수신자 부담 전화는 교환원이 상대방에게 내 이름을 말 해 주고, 전화를 받을 건지 말 건지 선택하게 해 주니까.
팁 하나. 로밍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받는 것은 대부분 무료다. 그러니까 간단한 용건은 문자로 받으면 된다. 문자 보낼 때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보내면 된다 (다 알고 있겠지만).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대부분은 그냥 버려진다. 특히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를 많이 이용하면서, 많이 찍는 만큼 또 많이 처박아 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진 한 장이라도 더 남기려고 애를 쓴다. 나 역시도 한 장이라도 더 많이 찍으려고 애를 썼었고, 좀 더 예쁘고 멋있는 장면들을 찍으려고 분주히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걸 탁 놓아 버렸다. 인연 있는 장면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내게 다가 오겠지, 내가 노력해야 할 부분은 좋은 장면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다가온 좋은 순간을 잘 잡아내는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난 점점 사진을 덜 찍게 됐고, 어떤 때는 혼자 노닥거릴 때만 사진을 찍게 됐다. 한 때는 사진 욕심에 DSLR을 장만하려고 눈에 불을 켠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냥 가벼운 똑딱이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어차피 그건 개인 취향이고, 뭐라 할 만 한 것이 못 된다. 어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어떻게 사진을 찍든지 그건 개개인이 각자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제발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보이는 사람들은 좀 찍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사진보다 인간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렇게 찍어가도 그 사진, 처박아 두거나 잊혀질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환히 웃어주는 사람들만 찍어도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부디 무리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방콕의 카오산 거리를 가 보면, 수많은 외국인들과 현지인들이 뒤범벅(?)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함께 즐기면서 어느덧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에 여행자들이 금방 익숙해지기 때문일까, 방콕에도 외국인과 말 한 마디 나눠 본 적 없는 현지인들이 아주아주 많다는 사실을 잘 잊어버린다. 모든 방콕 사람들이 카오산 거리의 상인들처럼 영어를 어설프게나마 조금씩 할 줄 알 거라고 생각 하게 되기도 한다.
그건 정말 카오산에서 얻은 착각일 뿐이다. 방콕에도 평생 외국인과 말 한 마디 못 나눠 본 사람도 많고, 영어로 숫자도 못 세는 사람들도 많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방콕에서도 외국인이 내게 말 걸어 줬다며, 그걸 특별한 경험이라 여기고 기뻐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방콕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어엿한 '현지인'들이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생활이 있고 삶이 있으니까, 굳이 시골 구석으로 가지 않아도 그들의 삶을 잘 관찰해 보면, 한 달을 다 바쳐도 모자랄 정도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삶의 모습들이 많이 있다는 뜻이다. 굳이 무리해서 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여행은 즐거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길 묻는 나를 목적지까지 직접 데려다 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길 묻는 나에게 툭툭을 불러 직접 가격 흥정까지 끝내 주고 타고 가라고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바가지 씌우지 말라며 내 흥정에 끼어들어 주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밥 안 먹었으면 자기가 먹고 있는 밥 같이 나눠 먹자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딘가에 전화해서 내가 가려는 목적지로 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아내서 가르쳐 주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도시락을 사서는 내게 슥 건내 주기도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내가 아직 많이 모자라서일까, 여행 하는 중간에는 꼭 안 좋은 사람, 안 좋은 일들만 마음에 담고 다닌다. 뒤늦게 이렇게 생각 해 보면,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여행자라는 신분으로써, 만의 하나 생길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일정한 안전선만 잘 지킨다면, 낮선 사람도 일단은 신뢰를 주고 만나도 괜찮겠다. 좀 더 여유롭게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자.
방콕에서 만났던 어떤 한국인 아가씨가, 현지인 남자가 밤에 만나자고 했다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주변에 있던 모든 한국인들이 그건 좀 아니라고 답 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혼자 하는 여행은 일단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남자라도 결코 그 위험들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하물며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더더욱 조심하고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그런 조심성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행자니까.
경계를 풀지 않는 긴장감을 항상 유지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좋은 사람과 만남을 가지고 싶은 마음. 경계만 계속 하다보면 어떤 사람과도 친해질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허술히 해서는 어쩌다 한 번 당한 나쁜 일에 많은 걸 잃게 될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여행자의 딜레마다.
해결방법은 그저 여유로운 마음가짐 밖에 없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고, 아닌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겠지. 애써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경험을 그대로 따라하려 하지 말자.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이니까, 모두 다 다른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작은 만남이라도 소중히 여긴다면, 굳이 친한 현지인 친구를 만들지 못해도 큰 상관 없지 않을까.
여행을 조금 해 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 즘은 들어 봤을 불문율에 가까운 조언이 하나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됐다면, 여행과 함께 사랑도 끝 내라".
서글프지만 정말 백 퍼센트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주변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연인 관계가 되어,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만난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결국 모두 깨졌다. 여행에서 보았던 모습과 일상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예외도 당연히 있다. 몇 사람 건너서 전해들은 커플 중에는, 그렇게 만나서 잘 된 커플도 있다 한다. 그러니까 꼭 그 말을 따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연애라는 게 이성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
어쨌든 사람들은 여행 할 때면 조금씩 달라진다. 일상에서 보이던 그런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여행을 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여행을 하다가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일상에서의 생활보다 약간 즐거운 정도의 변화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처럼 여행을 나오면 완전히 사람이 다르게 바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여행을 하는 동안에 보이는 내 모습이 정말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행에서 보이던 모습이 오래 유지되지 않고, 쉽게, 빠르게 다시 일상에 찌들어버리는 내 모습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본다는 것 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행에 중독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여행과 일상을 오가다가, 마침내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차라리 한국도 여행지라고 생각하면 여행자의 모습으로 한국에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 때부터 내게 일상이란 사라지는 거였다. 한국도 잠시 거쳐가는 여행지, 어딜 가도 여행, 그렇다면 내 모습은 여행자로 유지될 수 있을 거니까.
그래서 그걸 행동으로 옮겨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서서히 변해갔는데, 사람들은 그걸 느끼지 못 했다. 마치 내가 늘 그랬던 것 처럼 생각했다. 완벽한 변신이었다. 이제 나는 세상이 말 하는 바른생활을 위한 기본덕목들은 다 내던져버렸다. 삶의 궁핍함이 따라왔지만, 그대로 계속 거짓의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는 없었느니까. 변명을 하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행자들 속에서는 이해 되던 것들이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많았나보다. 난 점점 소위 평범한 사람들과 단절되어가고 있고,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역시 여행자가 있을 곳은 여행 속인 것 같다. 그래서 이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큰 여행을 준비중이다.
애인은 안 만드세요?
네, 안 만들어요.
왜요?
세상에 사랑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만 사랑하면 너무 많은 공간이 남거든요.
(어떤 여행자와 나눴던 대화. 나도 저렇게 멋지게 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행기를 쓰고 나면, 한참 있다가 '아, 이런 일도 있었는데, 저런 일도 있었는데, 그 에피소드도 말 해 줬어야 했는데'라며 뒤늦게 뭔가가 떠오를 때가 많다. 뒤늦게라도 그런 일들을 추가 해 놓으면, 나중에라도 누군가 그 이야기를 읽긴 하겠지만, 솔직히 한 번 쓴 글을 시간 지나서 다시 고치기는 너무 귀찮은 일이다. 뭐 어때, 미완성으로 남겨 두어도 여백의 미가 있는 거니까. 점점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이젠 정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