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4일, 저녁 7시부터 서울시청에서는 'IT 개발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청책 토론회'가 열렸다. 개발자가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미지가 강했는지, 처음엔 좌석을 조촐하게 마련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일곱 시가 다 되어서도 계속해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뒤어 접어놓았던 의자를 가져오면서도 놀라워했다. 그동안 개발자들이 얼마나 세상에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길래 이런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는가 싶은 대목이었다.
토론회는 박원순 시장이 착석하자마자 제시간에 칼같이 시작됐다. 사회자(곽동수 숭실사이버대학 교수)의 진행에 따라 간단한 국민의례와 함께 OKJSP의 노상범 대표의 발제가 시작됐다. 노 대표는,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인간답게 살자고 온 사람들'이라고 운을 떼며 PPT를 시작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재하청을 없애자: 2억짜리 프로젝트가 하도급을 타고 내려가서 결국엔 2명이 월급 300만 원을 받으며 진행하게 되는 현실. 소프트웨어는 무형의 자산이라 가격 산정이 어렵다. 그래서 각종 비리가 판을 친다. 이걸 깨려면 재하청을 없애야 한다.
- 보도방을 없애자, 파견을 없애자: 파견을 갔다가 병원 영안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예를 들었음.
- 야근비 주세요, 저작권 주세요: 지금처럼 저작권 자체를 갑이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갑은 사용권만 가져가고 저작권은 개발자가 가져야 SW 분야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 서울시와 개발자 간의 상시 소통 채널을 만들자
- 개발자들은 자구책으로 '소프트웨어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개발자는 여러 분야로 나눌 수 있어서 다양하고 복잡한데, 노 대표는 우선 한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SI 개발자를 위주로 발표를 했다. 하지만 이 토론회는 꼭 SI 개발자들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발제가 끝난 후에는 참석자들 중 (손을 들어서) 발언권을 얻은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했다. 그야말로 개발자에게 직접 듣는다는 제목 그대로였다. 사회자 말대로, '기존에 정책같은 것을 만들 땐 전문가라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앉아서 만들었는데, 지금 서울시는 정책 수립 전에 일선에서 실제로 일 하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참고로, 서울시는 IT(SW) 분야만 특별하게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니고, 검색해보니 예전에도 다양한 주제들로 청책토론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IT 청책 토론회는 그런 사회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였던 셈이다.
어쨌든 처음엔 '청책 토론회'라는 성격과는 다르게 서울시 정책에 질문하거나 항의하는 내용들이 좀 나오기도 했는데, 사회자가 '이 자리는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시간'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 후에는 현업에서 일하는 개발자들의 많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나온 이야기들 중 일부만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 대개의 갑들이 주장하는 '1년 무상 유지보수'는 사실상 재개발 해 달라는 말과 같다.
- 계약서에 보안 등의 사유라며 불공정 문구가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흔히 보도방이라 불리는 인력 알선 업체의 계약서에도 불공정 문구가 더러 있다. 개선이 필요하다.
- 한때 다녔던 금융권의 모 사는 8시 반 출근, 8시 반 퇴근이 공식 근무시간이었다. 이런 경우에도 야근, 휴일근무를 해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정부에서 구상권 청구하든지 해서 강제로 받아줬으면 한다.
- 급여를 3개월 이상 체불해야 노동부에 신고 가능하게 해 놓은 것은 굶어 죽으라는 말과 같다. 한 달 월급만 못 받아도 가계 타격이 크다. 1개월 체불해도 신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서울시 홈페이지부터 접근이 쉬워야 한다. 내부자료 검색이 여전히 불편하다. hwp 파일을 odf 등의 파일포맷으로도 제공해 주고, API를 제공하는 등, 제대로 된 웹서비스를 제공해 달라.
- 인력 육성은 양적 육성으로 해선 안 된다.
- 소프트웨어 품질을 정량화 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소프트웨어 공학 센터를 설립하는 건 어떤가.
- 을이라 불리는 하청업체들이 돈만 남겨먹으려 하고, 직접 사람을 뽑아서 일을 하려고 하질 않는다.
- 서울시 프로젝트를 할 때도 일만 시킬 뿐, 제대로 된 환경은 제공해주지 않는다. 프로젝트 작업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
- 유지보수를 해주면 돈을 안 주려 한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게 없는 사업이 되기도 한다. 유지보수를 정해진 기간과 금액으로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준같은 것이 필요하다.
별로 많은 사람이 말을 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시간은 이미 약속된 한시간 반을 다 채워가고 있었다. 아직 이야기를 하고싶어서 손을 드는 사람들이 꽤 남았는데도 시간 제약으로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사회자도 개발자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을 하는 모습이 놀랍다고 할 정도였다.
여담인데, 회사에서 개발자들이 말을 잘 안 하는 이유는, 1. 말을 해봤자 나중에 그 말에 대한 책임만 물으니까
2. 말을 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니까 3. 말을 하면 '그래 그거 니가해라'라는 반응만 돌아오니까 등이다. 회사에서 개발자들이 말을 잘 안 한다면, '우리회사 개발자들은 참 과묵해'하고 웃을 일이 아니라, 이미 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뜻이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가운데로 나와서, 한 시간 넘게 들으며 메모한 내용들을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정리했다.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개발자와 서울시청의 지속적이고 상시적인 채널을 만들자.
- 지금 서울시는 일을 줄 때, 이왕이면 중소기업이나 사회취약계층에게 주자는 입장이다. 이 연장선으로, IT 쪽도 중소기업 컨소시엄이나 협동조합 메니저 등의 접근 포인트가 있다면, 그 쪽으로 직접 도급하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 서울시 프로젝트를 위한 통합 작업실도 만들어야겠다.
-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패자 부활전 프로젝트를 고민해 보겠다.
- 무상 유지보수와 불공정 계약 이야기를 들으니, 좋은 발주자게 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시는 불공정 노동을 관리하기 위해 노동 모니터링을 운영하고 있고, 불공정 계약서를 없애기 위한 표준 계약서를 만들어서 공개하려고 준비중이다.
- 서울시도 부족하나마 앱 개발 센터 설치, 오픈 데이터 공개, 앱 개발 대회 개최, 창업보육센터 지원과 신용보증재단 운영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공무원들도 해당업무를 잘 아는 사람이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전문관 제도라는 직책을 두고 있기도 하다.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것 알아주기 바라고,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는 서울시가 되겠다.
'IT 청책 토론회'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사실 좀 중구난방이었다. 물론 서울시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바랬을 거다. 일관적인 틀을 가지고 정리된 이야기를 들으려면 이렇게 사람을 모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야말로 일종의 브래인 스토밍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이야기들 중에서는 서울시 차원을 벗어나는 이야기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막연한 한풀이를 넘어서서 이 사회에 작은 보탬이나 개선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 여기 모인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작은 이야기나마 펼쳐내며 들어주고 한 게 아닌가 싶다.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말 하는 사람을 보려고 몸을 돌리기도 하고, 중요한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기도 하며, 또 중간중간 트위터에 글을 올리기도 한 박원순 시장. 그에대한 고마움이었는지, 자리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길 원했다.
섣불리 희망을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작으나마 개선의 씨앗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자리의 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또 이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주눅들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개발자들이 더욱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대략의 분위기 스케치를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