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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치다케 사이클링 투어 - 홋카이도 자전거 캠핑 여행 11해외여행/홋카이도 자전거여행 2016. 7. 5. 09:10
캠핑장이 적당히 마음에 들었고 위치도 좋은 편이어서, 여기를 베이스 캠프 삼아 노닥거리며 느긋하게 비에이(美瑛) 같은 주변 동네를 자전거를 타고 구경할 생각이었다. 작은 동네지만 남는 시간에 동네 구경도 좀 하고, 저기 산 아래까지 들판을 건너 한 번 갔다와보기도 하고 그렇게 평안한 관광을 즐기려 했다.
그런데 캠핑장 안내소 한켠에 꽂혀 있던 팜플렛 중 하나를 펴 본 순간 불행(?)이 시작됐다. 다른 팜플렛들은 모두 후라노와 비에이 쪽 관광지 안내여서 아주 관광관광한 냄새가 풍기는 그저 그런 평이한 것들이었는데, 딱 하나가 호기심 자극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팜플렛 제목은 '토카치다케 사이클링 가이드'.
위 사진이 바로 그 팜플렛인데, 사진들을 딱 보면 예쁜 길을 배경삼아 남녀 한 쌍이 데이트 코스로 이용할만 한 자전거 라이딩 코스를 소개한 것 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아, 간단한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는가보다'하고 뒷면을 돌려보니 자전거 코스 지도가 몇 개 나와 있었다. 대부분은 후라노, 비에이 근처 시골길을 따라 평지를 하이킹하며 경치를 구경하는 루트였다.
그런데 그 중에는 도카치다케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코스가 소개돼 있었다.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아주 경치도 좋고 상쾌하고 최고다라는 식으로 설명 돼 있었다. 그래서 그 꼬임에 넘어갔다. 사실 도카치다케도 한 번 가봐야하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버스 타고 올라가서 우물쭈물 있다가 다시 버스 타고 내려오는 그 과정들이 귀찮아서 거의 가지 말자고 마음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이킹 코스가 떡하니 있으니 호기심이 생긴 거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야영장에 텐트를 그대로 두고, 대부분의 짐을 텐트 안에 그냥 둔 채로 가벼운 자전거로 상쾌하게 출발했다. 중간에 점심으로 먹을 편의점 오니기리를 사들고.
시작은 평이했다. 가미후라노 동네에서 산 쪽으로 가는 길은 거의 평지라서, 산 아래까지 별 힘도 안 들었다. 여덟시간인가 걸리는 코스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발해서 시간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고.
근데 미리 말하자면, 저 팜플렛에 나오는 토카치다게 루트는 아무래도 좀 좋은 자전거로 가는 걸 기준으로 삼은 게 아닌가 싶다. 고물자전거로는 무척 힘이 든다.
아무리 중고 생활자전거라지만 어째 캠핑장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바구니 달린 2단 기어 자전거보다 못할 수가 있는지. 캠핑장에서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별로 이용하지 않길래 한 번 타봤는데 내 자전거보다 훨씬 잘 나가더라. 그래서 시내 하이킹이나 장 보러 갈 때는 항상 그 무료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그게 특별한 자전거도 아니고, 일본에서 아줌마들이 생활용으로 잘 쓰는 바구니 달린 그 자전거다. 손잡이도 안쪽으로 휘어 있는. 모르면 말고.
관광지 밀집 지역을 벗어나 산 쪽으로 향하니 이내 숲들이 펼쳐지고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숲길은 산 아래쪽까지 완만한 오르막이라서 그럭저럭 달릴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지가 급경사가 막 펼쳐지더라.
도카치다케(도카치 산, 十勝岳, tokachidake)는 해발 2077미터의 활화산으로, 거의 홋카이도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일본 100대 명산에 속한다 해서 관광객들도 꽤 많이 찾는 산이다. 1988년에 대폭발이 있었다 하고, 요즘도 분화구 주위에서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등산객들은 분화구 근처까지 산을 타고 올라가기도 하는데, 보통 그냥 관광객들은 전망대까지 버스나 자가용 등을 타고 올라가서 인증샷 찍고 내려간다. 자전거 코스라고 소개된 것은 전망대까지도 안 가고, 등산로 입구 쯤에서 다른 길로 돌아 내려오는 경로였다. 전망대까지 안 가니 괜찮겠지 싶었지.
사이클링 코스는 딱히 설명할 생각 없다. 자전거 타고 올라가지 말고, 시간 잘 맞춰서 다른 사람들 다 이용하는 버스 타고 편하게 올라가서 구경하고 내려오기를 권장한다. 오르막길을 자전거 끌고 올라가느라 너무 힘들고 지쳐서 사진을 별로 안 찍어서 그렇지, 정말 지루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따가운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데 그늘도 딱히 없다. 거의 세 시간 정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고, 새로 사 간 1.5리터짜리 물은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마셔버렸다.
도카치 산으로 올라가는 차도 갓길엔 이런 그림이 군데군데 그려져 있더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거의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뭘까. 이 표식을 발견하고 해석하면 숲으로 난 작은 길을 통해서 어떤 비밀기지로 갈 수 있는 암호 아닐까 싶기도 한데.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면 차 타고 올라갈 땐 볼 수 없는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어서 좋긴 개뿔, 아무 쓸 데 없다.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약간 평탄한 길이 나오면 한숨 돌리며 잠시 쉰다. 근데 가면 갈수록 갓길도 좁아져서 마음놓고 쉴 수도 없다. 이 오르막길은 절대 데이트 코스로 웃으며 하늘하늘 오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물론 자전거 좀 탄 사람들은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절대로 웃음은 나오지 않을 거다.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 위로 더 올라가는 길도 있고, 옆으로 꺾는 길도 있다. 더 올라가면 전망대, 옆으로 꺾으면 캠핑장으로 향한다. 자전거 코스는 야영장 쪽으로 가는 걸로 돼 있다.
여기서부터는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된다. 거의 평지라고 할 수 있을만 한 길이어서 드디어 자전거에 올라타서 갈 수 있게 됐다. 이쯤 올라오니 기온이 달라졌다. 햇볕이 따갑기는 하지만,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시원할 정도다. 잠시 쉬며 기운을 가다듬고 출발했는데, 여기서부터는 물이 없어서 갈증에 시달렸다. 아, 정말 고행이다.
분화구가 올려다 보이는 탁 트인 공간에 캠핑장이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도에 여기 캠프장이 있다고 나왔기 때문에 텐트를 가지고 올라갈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짐을 다 짊어지고 산을 올라간다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왔다.
짐만 어디 맡길 수 있었다면 텐트만 간단히 가지고 올라와서 하룻밤 묵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했다. 살면서 언제 또 분화구가 바로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야영을 할 수 있을까. 노숙이라도 할 걸 그랬나 할 정도로 무척 아쉬웠다.
야영장 너머로 바로 도카치다케 분화구가 보인다. 그 분화구엔 흰 연기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바로 화산이 뿜어내는 연기, 분연(噴煙)이다. 정말로 이 산은 아직 살아있는 화산이다. 야영하다가 화산이 폭발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까 자동차 없이 여기서 야영하다가 화산이 터지면 인생을 뜨겁게 마감할 수도 있다.
야영장 구석 끄트머리 모습. 분화구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하루종일 텐트 생활을 해볼 수 있는 곳이다. 의외로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아아 정말 노숙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어. 어쩌면 밤엔 막 불빛이 번쩍번쩍 할 지도 모르잖아.
야영장을 대충 구경만 하고 다시 돌아나왔다. 마을로 내려가자. 어차피 야영장에 머물지 않을 거면 어둡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어두워지면 곰이 나올지도 몰라.
저 앞에 벽처럼 떡하니 막아선 절벽. 저거 크기도 꽤 크고 좀 쌩뚱맞기도 하고, 옆으로는 분화구가 보이기도 해서 정말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실제로 가보면 좀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캠프장에서 조금 나오니 또 다른 등산로 입구가 있더라. 뾰족뾰족한 자갈들이 쫙 깔린 돌길이었는데, 여기는 입산금지라며 막아놨다. 길이 열려 있으면 어느정도까지 차도 들어갈 듯 했다. 잠깐 기웃거려보니 꽤 묘한 분위기의 길이던데, 나중에 열리면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
어차피 갈 수 없는 길이었지만 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분화구로 조금 더 가까이 가보고 싶은데, 전망대도 포기하고 고생만 실컷하고 내려간다. 이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의 묘미다. 차가 있었다면 쌩하니 전망대 올라가서 좀 더 분화구를 가까이서 보다가 마침 폭발하는 화산에서 나오는 돌을 맞고 죽을 수도 있는데, 자전거는 애초에 그걸 포기하게 되니까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정말 이쪽 길은 음산한 건 아닌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든다. 어차피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었으니까 일부러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기운을 느껴봤는데, 묘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만약 가게 되면 아까 막혀있는 등산로 입구 쯤에서라도 차를 잠시 세우고 내려서 한 번 걸어보기 바란다.
산 옆으로 구불구불 뻗은 평평한 길을 무난하게 달렸다. 오르막길에서 물을 다 마셔버려서 한결 가볍게 달릴 수 있었는데 목이 마르다. 마침 비가 좀 내리길래 조금 받아 마신다. 비는 올라올 때도 오다말다 오락가락 했다. 차라리 완전 땡볕보다는 부슬비가 조금씩 내려주는 게 오히려 편하다.
내내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내리막길에서 속력을 좀 내면 춥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늘에서 가만히 쉬고 있어도 좀 쌀쌀한 느낌. 저기 분화구 근처의 듬성듬성 하얀 것들은 눈이 녹지 않은 거니, 대충 여기 체감온도를 짐작할 수 있을 테다.
분화구, 아쉬워서 계속 찍음. 남들은 전망대에서 두어 장 찍고 마는 거, 나는 생 고생해서 올라갔으니까.
아래를 내다보니 첩첩산중. 홋카이도가 섬이라서 높은 산에 올라가면 바다가 보이겠지 생각하면 안 된다. 홋카이도 면적은 남한 면적보다 약간 작은 정도다. 게다가 토카치다케는 홋카이도 중앙에 위치한 산. 바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죽을 고생 하고 올라갔다가 별 거 없이 다시 내려간다 하면 끝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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